호수 | 2242호 2013.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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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홍경완 신부 |
아는 분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모든 것이 혼란스럽습니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허망한 것인지 새삼 느낍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홍경완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mederico@cup.ac.kr
태초의 인간이며 인류를 의미하는 히브리말 ‘아담’은 흙, 땅을 뜻하는 ‘아다마’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인간은 처음부터 흙을 그 뿌리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그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진리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세상 만물은 하느님께서 ‘무(無)로부터’ 창조하셨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 속에는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무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을 빌리면 “늘 무화(無化)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존재입니다. 교회는 이 무화를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가르칩니다. 장례미사 감사송이 그 핵심을 꿰뚫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결국은 선택입니다. 무화의 위협을 외면하면서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삶으로 옮아간다는 가르침을 따르느냐, 그건 스스로 내려야 하는 가장 중요한 선택이요 결단입니다. 그 선택에 따라 삶도 죽음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