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설명될 수 없고 다 표현될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특히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다가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인간인 우리 자신만 해도 그렇습니다. 외적으로는 과학적인 검사를 통해 이런 저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촬영장비를 통해 인간의 구조를 분석하고 진단하여 생물학적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발자국만 본질적인 내부로 들어가 본다면, 우리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 인격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양심에 대해서, 생명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너무나 궁금하고 중요한 죽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본질적인 질문 하나를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 '왜 나는 아무렇게나 살지 않고, 도덕을 따지고 양심을 따지며 때로는 고생까지 자초하며 사는가?'
우리 모두는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라는 ‘믿음’을 적어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믿음 없이는 온갖 이기적 견해와 처세코드가 난무하는 세상을 꿋꿋이 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희망'합니다. 하느님은 살해한 자의 편이 아니라, 죄 없이 살해된 자의 편에 서 있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을 누가 확증해 줍니까? 과학적 세계관입니까? 미래의 역사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러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렇게나 사시지 않고 겸손한 마음, 의로운 마음을 고수하시며 '썩지 않을 삶'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시간에 얽매인 생명관을 넘어 영원으로 확장된 생명의 길을 가시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처형되신 주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선포는, 사랑의 마음으로 생명의 길을 가신 주님 편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서 계신다는 사실의 증언이며 고백입니다.
2009년 부활주일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우리의 고백도 ‘재물의 신, 탐욕의 신’이 압도하는 현실이지만,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이 여전히 건재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깨닫게 되는 생명의 의미와 방향은 십자가, 희생을 거름으로 하는 자기 죽음의 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옛날 제자들은 이러한 의미를 깨닫고 자신있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 "누구든지 주님의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주님의 삶의 방식’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마태 16, 24-25. 의미를 따라 수정 인용)
이 고백이 갈등, 걱정, 수고로 점철된 오늘의 우리의 삶에도 해방의 메시지, 생명을 위한 치유의 메시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