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오복음 5,17-37
오늘 복음은 ‘불가능함’으로 다가옵니다. 분노가 이미 살인이고, 눈길 하나가 이미 간음이라면, 누가 이 말씀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1독서 집회서에서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15,15)고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복음은 옛 율법 위에 무거운 짐을 더 얹은 것이거나 단지 더 까다로운 새 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뿌리, 행위 이전의 마음, 겉모습보다 속마음, 중심으로 데려가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그 뿌리가 되는 분노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서는 시선의 왜곡을 보도록 하십니다.
사람을 사물로, 욕망의 대상으로 축소하는 그 지점이 이미 죄의 시작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서 인격으로, 규정에서 관계로, 전례보다 먼저 형제에게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맹세 대신 진실한 말, 형식 대신 화해, 욕망 대신 존엄의 시선. 사람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바라보는 눈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물과 불, 생명과 죽음이 우리 앞에 놓여 있으니 손을 뻗어 선택하라고 합니다.(집회15,16) 그런데 늘 바른 선택을 하는 우리들은 아니지요.
우리는 하늘을 향한 갈망과 땅을 향한 욕망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시인 타고르처럼
주님, 제 마음의 문이 닫혀 있거든 그냥 돌아가지 마십시오.
그 문을 부수고 들어오십시오. 떠나지 마십시오, 주님.
ᆢ
당신의 자리를 다른 것에 내어주었을 때에도 떠나지 마십시오.
복음은 사람이 사람답게, 생명 안에서 살도록 이끄는 길로 들어서게 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해줍니다.
그 길을 걷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맡기는 우리가 된다면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