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3주간 훈화)
준주성범: 제19장 모욕을 참음과 참된 인내의 증거
1. 주님의 말씀: 아들아, 무슨 말을 하느냐? 나의 수난과 다른 성인들의 수난을 생각하여 불평하지 마라. 너는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히브 12,4 참조) 많은 수난을 당하고, 힘든 시련을 견디어 내고, 큰 고통을 당하고, 여러 가지 시험을 겪으며 단련된 사람에 비한다면 네가 당하는 고통은 매우 작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남들이 겪는 큰 고통을 자주 생각하면서 네가 당하는 작은 고통을 잘 참아 나가야 한다. 혹시라도 네가 당하는 고통이 커서 힘에 부치거든 인내의 부족 때문은 아닌지 살펴보아라. 네가 당하는 고통이 크든 작든, 무엇이든지 다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2. 자기가 원하는 대로, 또 자기 뜻에 맞는 사람한테서만 고통을 받으려 하는 사람은 참다운 인내의 덕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참다운 인내의 덕을 지닌 사람은 누구한테서 고통을 당하든지, 자기의 장상이든, 동료든, 아랫사람이든, 착한 사람이든, 성인이든, 악한 사람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든 상관치 않는다. 그는 누구한테든지 또 아무런 이유도 없이 터무니없는 고통을 당하고 여러 번 고생하여도, 그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유익한 것으로 생각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하느님을 위하여 참는다면 하느님 대전에 공로가 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묵상>
보통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이 상대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인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오히려 되갚아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준주성범은 모든 고통을 그리스도의 수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완덕을 위해서 참으라고 합니다. 오히려 고통을 인내하는 것이 하느님 앞에 공로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준주성범은 15세기 작품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55년 전의 신앙생활 지침서이지요. 고통 자체는 악이지만 그 고통을 하느님을 위하여 인내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길이라는 것인데, 과연 요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사순시기 단골 메뉴로 극기고행(克己苦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편하고 즐거운 것을 찾습니다. 우리가 화요일, 금요일에 고통의 신비를 바치지만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정작 나는 고통을 인내하지 못하고 피한다면 무슨 묵상이 되겠습니까? 타인의 비난과 지적에 쉽게 분노하며, 여러 가지 생활고에 불평하고 원망만 한다면 어찌 주님을 따른다고 하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