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12월 7-13일)
회개의 영성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 대교구)
대림 제2주간의 전례를 가로지르는 주제는 회개입니다.
주일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돌이켜보면 정초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짐했던 많은 약속이 속절없이 잊혔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한두 번 들은 게 아닌데, 뭔가 바꿔 보려 해도 성공보다 실패를 더 자주 겪는 게 솔직한 우리 모습이겠지요. 그처럼 타성에 젖은 자기를 보는 것도 안타깝지만, ‘정말 저 사람은 달라져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싶은 이들이 변화를 거부할 때, 그 완고하고 나태한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분노를 자아냅니다.
도와주려는 사람은 애가 닳는데, 정작 도움을 받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싶도록 무심하니 화가 안 날 수 없습니다. 레지오 단원들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지요? “기운 내서 이거라도 해보자, 도와줄게.” 하며 다가가도, 이리저리 핑계만 대고 도무지 변화하려 하지 않는 분들 말씀입니다.
그래서 레지오 교본 제37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거나 방치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활동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므로 이 활동의 열쇠는 인내심이다.
수없이 넘어졌다가 겨우 다시 일어서려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튼튼한 청년이야 뜀박질도 쉽게 하지만, 오래 투병한 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한참 용을 써야 합니다. 실패와 좌절을 여러 번 경험한 사람들이 마음만 고쳐먹는다고 금방 자기 생활을 개선하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내가 회개하는 것이 힘든 일이라면, 다른 사람을 회개하게 하는 것은 그에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긴 인내와 수고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악습을 못 버리는 이들 때문에 속상할 때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인내롭게 관심과 사랑의 손을 내미는 레지오 단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대림 제3주간(12월 14-20일)
성탄을 기다리는 내적 준비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 대교구)
전 세계 교회가 참여한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의 결과가 얼마 전 「최종문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이 문서 19항은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배척받는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다. 따라서 교회의 마음속에도 그들이 있다.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해주신 그리스도의 얼굴과 육신을 만난다.”라고 밝힙니다. 가난한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성찰해 볼 대목입니다.
레오 14세 교황님도 최근 발표하신 사도적 권고 「나는 너를 사랑하였다」에서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 또한 여러 차례 세속적인 이념이나 정치적, 경제적 접근 방식에 물들어 심각한 일반화와 잘못된 결론을 초래하는 태도에 굴복해 왔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자선 활동을 마치 소수의 강박관념인 양 여기고, 교회 사명의 뜨거운 심장이 아니라며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현실은, 우리가 복음을 세상의 지혜로 대체할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복음을 다시 읽을 필요성을 확신시켜 줍니다. 복음에서 샘솟아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열매를 맺는 교회의 거대한 흐름 안에 머물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15항)
어려운 경제 사정에 마음이 팍팍해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기보다 경제적 효율을 따지는 분들도 많습니다. 물론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일은 전체 사회의 복지 수준을 높이는 중요한 방법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주머니 사정이 좋아져도,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주머니도 열리지 않는 법입니다. 이웃을 위해 주머니를 열 수 없는 닫힌 마음은 우리 삶을 더 삭막하고 쓸쓸하게 만듭니다. 아기 예수님을 모실 구유를 만드는 것이 성탄의 외적인 준비라면, 우리 마음 안에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성탄을 기다리는 내적 준비라 하겠습니다.
대림 제4주간, 주님 성탄 대축일(12월 21-27일)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 대교구)
교회 전례는 성탄을 코앞에 두고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이야기를 복음으로 읽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가 뛰놀았고, 엘리사벳 자신도 큰 소리로 기쁨을 표현합니다. 마리아는 ‘마리아의 노래’로 하느님을 기쁘게 찬미하지요. 경사에 경사가 겹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일화를 오늘 우리 사회에 대입해 보면 사뭇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엘리사벳은 ‘노산’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만년의 임신과 출산을 겪는데. 오늘날이라면 ‘그 나이에 어쩌자고!’, 혹은 ‘아기 학교 갈 나이면 애 엄마 나이는 얼마나 되겠느냐’라며 혀를 차는 이가 나오겠지요. ‘산모가 늙어서 애 교육이라도 제대로 시키겠느냐’는 지청구가 따라올지 모릅니다. 마리아도 그렇습니다. 어린 처녀의 배가 불렀으니 자칫 입방아에 오르기에 십상입니다. 태어나는 생명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섣부른 훈수와 오지랖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를 다들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구유에 누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는 것은 생명 그 자체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축복이며 기쁨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던 지난날에도 ‘제 먹을 것은 제가 가지고 태어난다’라고 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생길 경제적 부담이나 불안감에 지나치게 짓눌리지 말고, 일단 생명을 귀히 여기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양육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손꼽히는 경제부국이 되었지만, 생명 앞에서 경제적 부담을 먼저 생각하는 불안은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까떼나를 바칠 때마다 그 안에 포함된 ‘마리아의 노래’를 함께 바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가야 합니다. 어떤 역경과 난관에도 생명에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우리 레지오 단원들도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모든 생명을 주재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실천 없는 기도는 공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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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12월 28일-1월 3일)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 대교구)
「역사의 교훈」이란 책에 따르면, 역사에 기록된 3,421년 중에서 전쟁이 없었던 해는 단 268년, 7.8%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전쟁은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는데,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하셨던 즈음은 놀랍게도 ‘로마의 평화’로 불리는 시기였습니다. 기원전 31년경부터 약 200년간 지속된 이 시기는 역사상 가장 긴 평화 기간 중 하나라고 하는데, 실제로 평화로운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사람들이 화합해서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적을 힘으로 눌러서 ‘찍소리 못하게’ 한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평화’를 위해서 로마 사람들은 작고 약한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몰았습니다. 억울하고 분해도 입 다물고 있으라는 가짜 평화가 로마식 평화의 본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루시는 평화, 곧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는 그 반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작고 약한 이들에게 다가가셨고 경청하셨습니다. 뭇사람들이 투명 인간 취급하던 사람들을 양지로 끌어내서 더불어 살게 하셨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그랬습니다. 신약성경이 기록하는 첫 번째 공의회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유대 관습인 할례를 놓고, 주류였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였던 비유대계 형제자매들의 의견을 경청한 끝에, 굳이 유대 관습을 강요하지 말자고 결정합니다. 작은 목소리라고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달하는 평화로움, 그것이 그리스도의 평화를 살아가는 예입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세계 평화의 날을 함께 지내면서 우리 레지오 단원들도 성모님의 모범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은 그저 입 다물고 계셨기 때문에 평화에 기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은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2)에서 보듯 남의 사정을 듣고 헤아릴 줄 알았기 때문에 모범이 되셨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