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33주일 강론)
종말 시대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입니다. 전례력으로 볼 때 다음 주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마지막으로 다해는 끝이 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마침이 있듯이 창조가 있으면 종말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다 없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의미합니다. 즉, 죽음과 멸망이 아니라 생명과 구원의 최종 단계를 종말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겉으로 듣기에는 좀 섬뜩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이 말씀은 곧 닥칠 예루살렘의 패망을 암시합니다. 역사적으로 실제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예고대로 서기 70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합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루카 21,8)
종말이 가까워지면 혼란의 시대를 겪는다는 말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나라가 흉흉하고 민초들이 피폐해질 때면 꼭 거짓 교설과 사이비가 판을 쳤습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21,10-11)
전쟁과 자연 재앙, 그로 인한 기근과 전염병은 인류의 반복된 역사입니다. 예수님도 예언자들의 계보를 잇는 분이시기에 종말의 전조를 묵시문학의 형태로 표현하십니다. 이 부분은 요한 묵시록에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이면에 숨어 있는 메시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요한 묵시록은 박해의 상징인 붉은 용의 횡포를 이야기하다가 결론 부분에서는 지구 종말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희망합니다. 박해와 재난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기 위해 만든 편지가 바로 요한 묵시록입니다. 예수님도 교회가 감당해야 할 박해를 미리 아시고 제자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기 위해 깨어 준비하는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은 희망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8) 예수님은 초대교회의 박해만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시대, 모든 세대의 제자들을 위하여 유언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종말이 찾아와도 그것이 끝이 아니니 인내하고 극기하여 구원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을 죽여도 영혼까지 죽이지 못하는 악의 세력에 굴복하지 말라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매년 전례력으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종말을 살기 때문에 현세의 삶이 고달프더라도 깨어 기다리며 희망을 품습니다. 모든 삶을 종말의 관점에서 바라는 보는 사람과 그저 지금의 삶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살기 때문에 지금의 삶을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으며 모든 일에서 초연합니다. 그리고 내 삶의 마지막 시간에서 지금의 내 모습을 바라보면 왠지 더 숙연해지고 더 의미 있게 살아가도록 늘 깨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피노자의 명언대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시 종말을 기다리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