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라노 대성전 봉헌축일
✠ 요한복음 2,13-22
오늘 복음은 성전정화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는 물론 요한복음에도 기재된 사화라는 것은 그만큼 복음사가들이 중요하게 여긴 사건, 각인된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가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시는데 그 바로 다음에 오늘 복음이 이어집니다.
첫 사건은, 보고 있던 제자들의 믿음을 고무시켰다면 오늘 두 번째 사건은, 믿음을 흔들어 깨우고 있습니다.
믿음은 끊임없이 새로움에 눈뜨면서 자라나지 않으면,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 습관적으로 하는 의례 행위로 남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324년에 건축된 로마교구의 주교좌(교황님이 교구장이시라는 것을 아시지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무너지고 재건하는 과정을 거쳐 지금의 건축물은 1600년대에 재건축된 것입니다. 물론 오늘 모든 가톨릭신자가 함께 기념하는 대축일의 의미는 건물에 있지 않습니다.
로마의 성당을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함께 기념하는 까닭은 다름 아닌 '각 지역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란 무엇인가?’하고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에제 47,1.9)
1독서는 교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은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이 은총의 강가를 떠나지 말고 듬뿍 들여 마시라고 초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은총의 샘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에서 손에 채찍을 드셨습니다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 강경하고 엄격합니다. 신앙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면 가지지 못한 것보다 못할 수 있으니까요.
이는 그 당시 성전예배를 둘러싸고 행해지던 부패한 상업행위를 중단하라는, 교회지도자들을 향한 꾸짖음이지만 또한 우리를 향해서도 묻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의 성전은 어떠한가?' ‘하느님보다는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은가?’
아니,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보다도 더 깊이 질문하고 있습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상업적인 관계는 아닌가? 곧, 내가 이만큼 드리면, 이만큼 잘하면, 이만큼 기도하면, 하느님은 나에게 그만큼 은총을 주시는 관계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물으십니다.
그런 성전, 그런 관계는 무너져야 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21)
이 말씀이 당신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말씀인 줄을 우리는 압니다.
한 달 전부터 미사 독서로 읽고있는 로마서 말씀 중 지금 인용할 구절은 건너뛰었는데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5,7-8)
우리 믿음의 중심에는 십자가, 아니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거저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 내가 무얼 해서가 아니라 내가 당신 아들, 딸이니까 그냥 나를 좋아하신다는 이 진실에 바탕을 둔 신앙이 우리 안에 자리하기를 청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이 사랑을 알아가는 일이고 이 사랑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사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