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아 평의회 훈화(2025.11.2.)

가을 나무가 전하는 교훈

11월 가을 그리고 위령 성월이다. 어느날 범어사를 걷고 있는데, 물기가 빠진 채 말라가는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낙엽을 밟으면서 걸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무에게 가을은 또 한 번의 고통이며, 또 한 번의 죽음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나무의 죽음을 밟고 있다.”

사실 우리가 낙엽을 밟는 것은 나무의 죽음을 밟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나무는 자신의 죽음을 보고 있고, 또 자신의 죽음을 밟고 있는 우리를 보고 있다. 과연 나무는 우리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자신의 죽음을 보고 있음에도, 그 나무는 몇 년 아니, 몇십 년, 몇백 년을 계속 이러한 반복을 체험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끝없는 죽음을 경험하는 나무가 결코 죽지 않고, 다시 봄이 찾아오면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이유는 바로 뿌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며, 그 뿌리를 보호하는 땅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가 잘려나가도, 몸통이 잘려나가도 그리고 그루터기만 남아도 괜찮다. 왜냐면 그래도 뿌리가 땅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뿌리가 살아있기에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죽음을 수없이 바라보는 나무가 슬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희망과 믿음이 보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진리를 자신의 죽음을 밟고 있는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만 나와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진지해진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죽음이 마지막, 끝이라는 생각 때문이고, 영원한 이별이라는 생각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뿌리가 땅에서 뽑히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새로운 내일을 기다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영혼과 마음과 정신과 육체의 뿌리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고, 튼튼하게 붙어 있다면 우리의 죽음 또한 결코 마지막일 수 없다. 오히려 죽음은 새로운 시작, 그리고 더 나은 내일, 완전함과 충만함이 있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의 순간이다. 그리고 우리 인생 여정의 마지막 종착역이며, 우리의 안식처다.

죽음은 결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죽음은 우리를 영원히 죽이지 못한다. 하느님의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하느님과의 만남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을 잘 준비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함으로써 죽음을 이기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뿌리를 하느님께 튼튼히 자리 잡고, 그분께 영양분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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