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30주일 강론)

 

겸손의 미덕

 

오늘 복음은 의로움의 기준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동양의 겸양과 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양의 겸양은 타인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고 겸손되이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간 실존의 비참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리는 직업상 죄인입니다. 로마 제국에 세금을 바치기 위해 동족들에게 이중과세를 부과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당연히 고개를 들 수가 없지요. 그러나 죄의 경중만 다를 뿐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래서 미사 초반부에 우리 모두는 참회 예절을 가지고 자비송을 바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을 모시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를 뉘우쳐야 합니다. ‘제 탓이요를 가슴을 치며 세 번 외쳐야 하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또 세 번 외쳐야 합니다. 세 번씩 하는 이유는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미사성제의 은총을 온전히 받기 위한 회개의 과정입니다. , 우리의 타고난 인간성은 완전히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불완전한 상태이며,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도저히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인간의 비참한 처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내가 실정법이나 교회법을 어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선천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오직 하느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겸손입니다. 또 겸손은 자신의 본성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그들은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지 않고 오로지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기만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처럼 말입니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입니다.

 

첫째, 교만한 사람은 타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말만 합니다. 자기 생각이 다 옳고 자신이 진리라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상종하지 않으려 하고, 비겁하게 뒤에서 비방하고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합니다.

 

둘째,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소유와 능력을 과신하여 상대를 우습게 생각하고 깔봅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안하무인으로 대하고, 타인들이 자신을 존경하고 칭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쉽게 분노합니다.

 

셋째, 결정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합니다. 계명 생활 준수를 자신의 공로라고 여기며, 하느님과 거래하듯 자신의 공로로 보상받기를 원합니다. 사실 그러한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을 추앙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아무리 은총을 베풀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교만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칠극에 인용된 베르나르도 성인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네가 온 곳을 생각한다면 너무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할 만하다. 지금 있는 곳을 생각한다면 몹시 탄식하며 통곡할 만하다. 앞으로 갈 곳을 생각하면 심히 두려워 떨 만하다. 사람이 언제나 이 세 가지 생각을 간직한다면 교만은 마땅히 저절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네가 온 곳은 어디일까요? 어머니의 자궁이지요. 개구리가 올챙이 적 기억 못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진시황이라고 해도 그 생명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근원적으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왔습니다. 지금 내가 아무리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나의 생명은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근원을 생각해 보면 나는 스스로 잘났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곳은 어디 일까요? 우리는 현세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은 소멸합니다. 지금의 소유와 건강이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탄식하고 통곡할 노릇입니까? 마지막으로 우리가 앞으로 갈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천국이지요. 지상 순례가 끝나는 날 나의 육신은 소멸하고 영혼은 하느님 심판대로 갑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두려워해야 하지요. 육신의 욕망을 채운다고 영혼을 파멸시켜 스스로 지옥으로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끝을 아는 사람은 결코 교만하지 않습니다. 건강도, 재산도, 권력도 다 끝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만을 극복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리의 기도를 모범 삼아 겸손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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