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28주일 강론)

 

생로병사의 인생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시인 한하운은 나병환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한을 승화시켜 한편의 명시를 남겼습니다. 일종의 인간 승리이지요.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강제로 소록도로 추방당했던 그의 심정은 참으로 절망적이고 비참했을 겁니다.

 

오늘 열왕기 하권에 나오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나병을 앓았다가 엘리사 예언자를 통해서 기적적으로 나병을 치유받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믿음으로 요르단강에 몸을 던진 그에게도 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이방인 신분으로 하느님께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제 그는 나병만 치유 받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 명의 나병환자는 모두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고 기적적으로 나병을 치유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유다인 아홉은 모두 사라졌고,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유다인 아홉은 자신의 목적인 나병 치유만 받고 끝났지만, 사마리아인 한 명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까지 받게 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이방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병 치유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나병을 치유 받았다 하더라도 사람은 언젠가 육신의 종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로병사합니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해도 노화와 질병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시인 한하운처럼 자신의 아픔을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고, 오늘 성경에 나오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과 사마리아인처럼 자신의 나병을 통해서 주님을 체험하고 영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초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출생 인구보다 사망 인구가 훨씬 더 많습니다. 누구나 무병장수를 꿈꾸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를 모르고 생물학적인 연명만 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병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물론 육신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늙는 것과 병에 걸리는 것은 다 주님께서 주신 삶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생명의 하느님께서는 늙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참으로 지혜로워지기를 바라시고, 병마와 싸우는 과정을 통해서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며 참으로 성숙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안타깝게도 안락사하는 사람들은 고통이 주는 불행을 인생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고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조차도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라고 여깁니다. 오늘 티모테오 2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박해로 인한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복음을 위해서 나는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2티모 2, 9.11)

 

많은 교우들이 병석에서 혹은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합니다. 종부성사를 주면서 저는 느낍니다. 그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 왔는지, 어떻게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는지. 살아온 햇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을 만나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래서 여한도 없고, 당당히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며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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