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21주일 강론)

 

선민과 만민

 

2003년도 이스라엘 성지순례 중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고르고 계산하러 줄을 서고 있는데, 어떤 유대인 랍비가 슬쩍 새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물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지 않느냐고.’ 그런데 돌아온 답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기 나라에서는 이방인들보다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만 아니었다면 내가 여기 올 이유도 없다. 치사하고 교만한 새끼들아!’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선민의식은 민족 우월주의하고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세사 안에서 하느님께 선택을 받은 민족은 맞지만, 그것은 만민 구원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선민이라는 것이지요. , 유대인들은 혈통으로써 선민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선민이며, 이는 만민 구원의 물꼬를 트는 역할에서 맏이라는 측면에서의 선민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 66,18) 이는 오로지 유대교로 개종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해야지만 하느님 백성이 된다는 종교적 배타주의하고는 다른 의미입니다. 물론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전혀 다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다시 말해 예수님은 당신의 복음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동서남북의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설파하신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가르침이지요. 유대인에게만 유보된 구원이 만민들에게도 가능하다니 선민사상으로 가득 찬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굉장히 모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의 하이라이트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자리와 순서가 뒤바뀐다는 역설입니다.

 

아무튼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을 향하여 선교하다가, 그들의 지속적인 박해로 인하여 이방 세계로 눈을 돌려 만민 선교에 앞장서게 됩니다. 구원은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열매는 오히려 이방인들에게서 맺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경우는 우리 안에도 존재합니다. 신앙 안에서의 우열은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에 있지, 세속적인 능력과 지위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보실 때에는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은 자이며,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부자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학위가 있는 신학자보다 배움은 없어도 매일 묵주기도 하시는 시골 할머니의 영성이 더 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선심 쓰는 부자보다 가진 것은 없어도 자신의 생활비를 아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빈자가 더 부자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꼴찌입니까? 아니면 첫째입니까? 그 순서는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요.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도 아무런 위기의식이 없습니다. 이미 구원을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좁은 문에 비유하십니다.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 하느님 나라라는 것이지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첫째가 되는 비결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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