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19주일 강론)
마음과 자리
동기 신부 중에 요즘 천체 망원경에 푹 빠져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와 은하계의 행성들을 보면 참으로 경이롭고 신비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느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네요. 반면에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피조물이고 한계 지어진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 우주를 창조하신, 그래서 우주보다 훨씬 크신 하느님이 비천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는 우주보다도 크고 더 아름답다고 말입니다. 인간이 소우주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육신 생명은 보잘 것 없지만 인간의 영혼 세계는 우주를 다 담아내고도 남을 만큼 크고도 넓습니다. 그 영혼 안에 우주보다 더 크신 하느님을 담아내면 어떻겠습니까? 즉, ‘나’라는 존재를 하느님으로 가득 채우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느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내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이 되겠지요? 그러면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또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무릇 신앙생활은 내 마음을 하느님의 마음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그 마음은 베푸는 마음이고, 사랑하는 마음이며,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완전해집니다.
지난주 복음의 주제는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려라.’였습니다. 한 주간 여러분들은 그렇게 사셨습니까? 이번 주 복음의 주제는 ‘늘 깨어 준비하여라.’입니다. 어찌 보면 이 둘은 서로 다른 주제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같은 주제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를 묻는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 있느냐 아니면 하느님에게 있느냐에 따라 최후 심판의 결과는 달라집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마음이 세상에 있는 사람은 재물을 땅 위에 쌓고, 반면 마음이 하느님에게 있는 사람은 재물을 하늘에 쌓습니다. 인색한 부자가 되느냐 아니면 자선을 베푸는 부자가 되느냐는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인을 깨어 기다리는 종의 비유도 그런 맥락에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마음이 주인에게 있는 종은 자기에게 맡겨진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하며 늘 깨어 주인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마음이 주인에게 있지 않은 종은 주인의 재산을 탕진하며 주인이 오든 말든 잠만 자고 있습니다. 그 결말은 뻔합니다.
‘그 무엇에 마음이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에 마음이 있는 사람은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선에 마음이 있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또 무엇에 대하여 ‘깨어 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깨어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하느님께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깨어 있다’는 말 안에는 우리의 마음이 온통 그것에 머물러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를 들어 주일미사 안에서 하느님을 뵈옵는 마음이 넘치면 미사 자체는 천상 잔치가 됩니다. 매일같이 축제가 열리는데 왜 안 오겠습니까? 제일 먼저 와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들겠지요. 그리고 축제가 끝나더라도 그 여운 때문에 자리를 떠나지 않겠지요. 천상 잔치인 미사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은 잔치의 주인이신 주님께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미사에 매번 지각하고 파견성가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 뜨길 바쁘고 세속 안에서 주님 말씀과 상반되게 살아간다면 미사는 교회법이 정한 의무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이 머무는 곳이 바로 내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성전에 내 몸이 있다고 하지만 마음이 주님께 없으면 나는 성전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미사를 궐하면 고해성사를 봐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일은 그저 쉬는 날이기 전에 하느님께서 왜 나를 창조하셨는지를 돌아보는 날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침묵 가운데 묵상하다 보면 내 삶의 의미가 바뀝니다. 창조는 그 자체로 축복입니다. 즉, 우리 삶 자체가 축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주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하느님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축복받은 이유는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을 수 있고 병들거나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축복받은 이유는 하느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축복의 기준을 물질적 소유와 육신의 건강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하느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현실적인 불편과 고통을 주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공간 속의 물질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 속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거룩히 지냄으로써 모든 일상을 성화합니다. 주일미사는 종교 예식이기 전에 하느님께서 주신 영적인 휴식 안에서 내 삶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또한 미사는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기도, 찬양, 봉헌) 하는 시간이 아니라 황송하게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봉사하시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놓으시는 시간이 미사인 겁니다. 그런 하느님 앞에서 나의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생명의 은총에 환호하는 시간이 바로 미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