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18주일 강론)
여러분, 부자 되세요.
인간의 평균 수명은 어디까지일까요? 60년대에만 해도 환갑잔치 못 하고 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환갑을 아주 쉽게 넘기기 때문에 잔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평균 수명이 85세이고 100살을 넘기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쉰 살에 결혼해도 부부가 금경축을 맞이할 때까지 장수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보입니다. 아무튼 창세기에 나오는 성조들처럼 우리는 오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바뀌지 않는 불변의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온 햇수가 인생의 깊이와 품위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수명 이상의 의미를 추구하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과 행복 지수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물질이 인간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 필요를 채우고 나면 물질 자체가 행복 지수를 더 이상 높여 주지는 않습니다.
오늘 전례 독서는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 그리고 재물에 대한 탐욕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 코헬렛서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3세기의 작품인데 일독을 권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혜는 매 한 가지입니다. 코헬렛서를 읽다보면 오히려 옛날 사람들이 더 지혜롭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2독서 콜로새서에서는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콜로 3,5)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오늘 루카 복음은 우리에게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인색한 부자의 말로가 참으로 비참합니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의 재물관은 어떨까요? 일단 가톨릭교회는 공산주의와 달리 사유재산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재화는 하느님에게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사유재산 또한 공공성을 위해서 사용되기를 권장합니다. 아울러 사유재산을 축적하는 방식이 양심을 거스르는 부당한 방법이거나 인간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정당한 방법으로 성실히 노동하여 쌓은 재화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되 잉여재산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구제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재물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재물을 의롭게 사용하고 가련한 위해 내어놓는다면 더 큰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선이야말로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쌓는 보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컨대, 일제 치하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의 “국채 보상 운동”을 보십시오. 그는 돈만 버는 사업가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재물로 독립운동에 앞장선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재물이란 삶의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는 자신의 재화를 잘 활용하여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추구하면 되는 것이고, 빈자는 가난하게 태어나시고 가난하게 복음을 전하시며 가난하게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영적인 부유함을 추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위에 있는 것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땅에 있는 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돈이 너무 많아 쓸 곳이 많은 사람은 무척 바쁘게 삽니다. 또 만족을 모르고 필요 이상으로 쓸 곳이 많으니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재산을 늘리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성당에 나올 시간이 없습니다. 사실 헌금도 아깝습니다. 부족함이 없지만 항상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넉넉하지는 않지만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범사에 감사드리며 기도와 미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한 과부의 렙톤 2닢 이야기처럼 소소해도 본당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내어놓을 것이 있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영성적인 삶입니다. 영성이란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우리들은 영성적인 삶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