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중미사 강론
2025.07.20 21:14

연중 제16주일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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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다해, 2025년 7월 20일)강론
 
오늘은 연중 16주일이면서 한국천주교에서는 1995년부터 농민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난화가 점점 빨리 진행되는 오늘날 예측하지 못하는 기후의 변화와 수요와 공급의 예측을 잘못해서 한해를 열심히 땀 흘리고도 그 노고가 허사로 돌아가거나 오히려 빚더미에 앉아야 하는 우리 농민들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아무리 공업과 상업이 발전하고 세상이 새로운 첨단정보사회로 바뀌고 있다하여도 인간은 먹어야 살기에 농업은 여전히 기초산업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농민들이 땀 흘린 대가를 제대로 보상받을 수 있게 분배의 정의가 잘 실천될 수 있도록, 그래서 도농 간의 빈부격차도 줄어들어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요즈음은 각 본당에 성소가 줄어서 신학생들이 얼마 되지 않지만, 과거에는 한 본당에만 9명의 신학생이 있을 정도로 성소가 많았던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 부산교구에 그런 본당의 한 신자분이 식욕이 왕성한 신학생들과 소고기집에 간적이 있습니다. 종업원들이 차려놓는 즉시 그야말로 ‘싹쓸이’였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갖다놓은 즉시 초토화되고 심지어는 그릇까지 베어 먹을 기세였습니다. 신학생들이 얼마나 먹었던지 나중 그 신자분은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결심합니다. 다시는 신학생들 데리고 고기집에 가지 않겠다고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고을 저 고을 전도여행 다니느라 허기진 장정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12명이나 되는 예수님 일행이 마르타와 마리아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아마 허기진 일행들은 음식을 차려놓기가 무섭게 싹쓸이했을 것이고, 이에 주방 총 책임자 격인 언니 마르타는 그야말로 분주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를 한번 보십시오. 언니는 음식을 준비하랴 시중을 드느라 바빠 죽겠는데 마리아는 손 하나 꼼짝하지 않고 화사한 얼굴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타 입장에서는 속이 상했겠지요. 생각 같아서는 “마리아, 너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여? 나 바빠 죽겠는거 안보여?” 하며 당장 주방으로 끌고 갔을 텐데,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예수님께 볼멘 목소리로 따집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그때 만일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당연히 이랬을 것입니다. “그래, 마리아. 이제 좀 일어나서 언니 좀 도와주지. 사람이 눈치가 좀 있어야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것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사도직 활동은 더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일에만 목숨을 걸 때 우리는 쉽게 지칩니다. 불평불만이 쌓여만 갑니다. 마르타처럼 다른 사람을 탓합니다. 그리고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휴식도 없이 오직 일에만 올인하는 일 중독자들의 끝은 결국 허탈함이며 공허함이며 피곤함입니다. 플러스알파를 찾아야 할 지혜가 필요합니다. 바로 마리아처럼 하느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하느님 발치에 앉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이처럼 신앙인의 삶은 활동과 관상의 삶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들으면서 몇 가지 점을 함께 묵상해 볼까 합니다. 먼저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를 너무 비교하고 너무 쉽게 판단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단정합니다. 예를 들면 학원을 4-5개씩 보내는 초등학생 엄마에게 ‘왜 그렇게 아이가 많은 학원을 다니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학부모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남들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안보내면 뒤처지는 것 같고, 불안해서….’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아이를 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마음 안에는 ‘남들 다하는데’와 ‘불안해서’라는 두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또한 남과 자꾸 비교를 하다보면 그 비교 대상보다 나으면 교만해질 수 있고, 그 보다 못하면 열등의식에 사로잡히는 죄를 범하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도 자신의 일이 옳고 동생의 일은 게으른 짓이라고 비교하며 판단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한 소리를 듣게 됩니다.
 
둘째, 우리 가톨릭교회가 과거 공의회 이전에는 오로지 기도 생활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반대로 오로지 활동이 전부인 양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 그것은 자기과시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많은 수도원에서도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는 것처럼 활동과 기도의 조화 그것이 신앙생활의 이상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도 세상의 여러 가지 일에만 몰두하여 남과 비교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더 귀 기울이며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과거 시대의 사고방식, 차별, 우월감 등에 마음을 쓰지 말고,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