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16주일 강론)
무엇이 중한디?
유다인들의 조상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까지 떠돌이 유목민이었습니다. 초원과 샘을 찾아 양과 염소 떼를 이끌고 다니며 천막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나그네 신세에 대한 동병상련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제 1독서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은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즉, 주님의 천사 세분이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천막에 머물게 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종의 모습으로 그들을 맞이하고 융숭하게 대접하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알고 보니 그 나그네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이었고, 이윽고 그들을 통해 99세가 될 때까지 적장자가 없었던 아브라함은 머지않아 아들을 볼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듣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유다인들은 굶주림과 목마름, 그리고 강도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나그네들을 외면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전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좋은 전통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한때 어려웠던 시절, 무전취식하는 가난한 학생들이나 걸인들에게 공짜 밥을 주었던 미담을 듣지 않았습니까? 가련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비는 복을 불러들일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마태오 복음, 최후의 심판 대목에 나오는 ‘너희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를 들여다봅시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꼭 들르셨던 친구 라자로의 누이들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유로웠던 그들의 집에서 예수님과 그 일행들은 여독을 풀며 숙식을 해결했습니다. 간만에 주님께서 오셨는데 마르타와 마리아는 얼마나 들떴겠습니까? 두 자매는 각자의 방식으로 주님을 모셨습니다. 마르타는 온갖 음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편의를 봐 드리는 시종으로,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제자의 모습으로 주님을 모셨습니다. 이 둘 중에 누가 더 훌륭하고, 누가 더 훌륭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주한 마르타에게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하시며 조용히 타이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행한 시중 자체를 무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 시중드는 일이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이든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지요.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로 주님께 인정받고 싶어서 그만 동생 마리아와 주님을 비난합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지요.
이번 주 레지오 훈화인 준주성범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람이 자기의 재산을 다 내놓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보속을 많이 하였다 할지라도 그다지 장할 것이 없다. 학문을 다 연구했다 할지라도 아직 멀었다. 큰 덕행이 있고 뜨거운 신심이 있다 할지라도 아직 크게 부족한 것이 있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한 가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다 떠났다면, 이제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완전히 벗어 버리며, 사사로운 사랑을 털끝만큼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 자기가 할 바를 다 했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공로로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존경과 사랑을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강조되는 것은 애덕 실천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그분께 대한 집중과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아무리 우리가 계명을 충실히 실천한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칫 기도가 수반되지 않는 선행과 봉사는 자기만족이나 자기 과시가 될 수 있습니다. 마르타는 외형적으로는 봉사를 하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을 채우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든, 성경을 읽든, 봉사를 하든,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전제가 생략되면 기도를 하면서도 영성이 자라지 못하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성화되지 못하며, 봉사를 하면서도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