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15주일 강론)

 

관념적인 사랑과 실천적인 사랑

 

(서울 신부님과 부산 신부님)

 

사랑은 말로 할 때도 있지만 행동으로 할 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와 실천을 병행해야 합니다. 또 믿음은 행실로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루카 복음 10장의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 바로 앞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애덕 실천을, 주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는 관상 기도를 상징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두 가지를 긴밀히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상호 교환합니다. ,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충격적인 것은 자타공인 종교인이었던 유다교 사제와 레위인의 처신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성전 제사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하느님을 섬기던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그들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어겼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율법의 대원칙은 잊은 채 율법 세칙 준수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대원칙은 신명기와 레위기에 나와 있듯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이 부분을 율법학자가 정확하게 예수님께 답했고요. 그런데 유다교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에게 맞아 초주검이 된 동족을 외면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그 이유는 율법에 따르면 제사를 지내는 사제와 레위인은 시체를 만져서 부정 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 세칙을 준수하기 위해서 사제와 레위인은 혹시나 시체일지도 모르는 동족을 외면해 버립니다.

 

그런데 반전은 강도당한 유다인을 도운 것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을 하지 않습니다. 유다인의 입장에서 사마리아인은 말도 섞으면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을 성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림짐 산에서 별도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순수 혈통이 아니라 혼혈인들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사마리아인들은 짝퉁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이웃이라는 개념을 더 확장시킵니다. 유다인에게 이웃은 오로지 동족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이웃이란 민족도, 종교도, 문화도 초월하여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약자를 의미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토록 자신들을 혐오하던 유다인이었지만 그의 사정이 딱한 것을 보고 사비까지 털어 돌봅니다. 두 데나리온은 이틀 치 노동자의 임금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관념적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구체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집을 나섰는데 갑자기 길에 쓰러진 노파를 만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외면하고 성당에 가야 합니까? 아니면 미사를 궐하더라도 119가 올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해야 합니까? 무엇이 하느님께 합당한 제사입니까? 이런 일은 극히 드문 경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일상에서 소소하지만 절실하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울러 성당에서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하는 노인들을 위해서 어떤 배려와 양보를 했습니까? 오늘 신명기에서 모세는 율법서를 펴들고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1.14)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말씀을 입으로 전하고, 마음에 새기며, 행동으로 실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