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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13일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강론

by 김해_홍보분과베네딕도 posted Jul 0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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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13일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수난 복음은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일조를 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인간이 가진 죄성을 폭로한다. 게다가 예수님의 죽음은 옛날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 역사 안에서 여러 번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건임을 직시하라 한다. 

         
예수님의 처형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은 « 흉계를 꾸며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모의한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득권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성전 정화 사건에서처럼, 성전세와 장사꾼들에게서 받는 수입원을 깡그리 없앨 수 있는 위험인물이었다. 어두움은 빛을 거부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없애버려야 할 눈엣가시였다. 

        
예수님의 처형에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이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예수를 배신한 가리옷 사람 유다였다. «  내가 당신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면, 그 값으로 얼마를 주겠소 ? » 유다는 스승을 당시 노예 하나 값인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겼다. 돈에 대한 욕심은 인간을 눈멀게 한다. 황금만능 풍조에 찌든 많은 이들에게는 돈이 바로 하느님이기에 밀고와 배신과 청부살인은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언제나 존재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처형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현세적인 출세를 꿈꾸며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스승이 체포되자,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을 예견하고는 뿔뿔이 도망쳤다. 신앙 때문에 어떤 불이익이라도 생긴다면, 언제나 도망칠 수 있는 신자들은 지금도 많다. «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면서 세 번이나 배반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무기력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들만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 아니다. «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라는 선동에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놀아난 군중들도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 군중을 움직이는 데는 복잡하고 깊은 철학보다는 한 두 마디 선동적인 구호가 더 효과적이다 ». 매스컴의 암시에 따라 덩달아 춤을 추는 여론 재판, 관제 데모, 동원 폭력배 등, 지난해 12월 3일 이후 지난 4월 4일 11시 22분 전까지 우리가 늘 봐왔고 들어왔던 현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하면서도, 선입견이나 여론몰이 하느라 정신 없는 뻐꾸기들의 말에 놀아났다.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발뺌을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그 죽음에 책임이 있다.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고 있었던 빌라도 총독은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를 보고, 예수의 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하라 »고 하며, 예수님을 형장으로 넘겨버렸다.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양심에 철판을 깔아주었다.  « 만일 그 자를 놓아준다면, 총독님은 카이사르의 충신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카이사르의 적이 아닙니까 ? » 라는 억지말로 예수님을 카이사르의 정적으로 부각시켰던 것이었다. 그들의 말은 가뜩이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이었던 빌라도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혹시 동향보고라도 올라간다면, 출세는 끝장이 아닌가 ?’.

   
결국 예수님은 갑자기 정치범이 되어버렸다. 그의 죄명, INRI Iesus Nazarenus Rex Iudæorum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 이 죄명이 예수는 쿠데타의 장본인으로 정치범으로 십자가형을 당하게 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해서는 무죄인 줄 알지만, 몇 명, 아니 몇 천 명쯤 죽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또라이 정치인들은 존재해 왔고,
 우리는 그러한 한 예를 다른 곳도 아닌 이 나라 이 땅 대한민국에서 보았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득권 수호와 돈 욕심과 비겁함과 정치적인 출세를 위해 공모한 합작품이었다. 사건번호가 붙지 않았지만, 분명히 역사 안에서 발생했던 예수 사건은 2천년 전에 종결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러한 사건에 때때로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동참하고 있다. 

     
수난 복음은 지금도 지구상의 어떤 곳들에서 또다시 쓰여지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해골산으로 오르시던 그 시간, 예수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었던 이들, 십자가의 육중한 무게에 짓눌려 쓰러지던 예수에게 발길질하고 채찍질하던 이들, 예수의 고통과 죽음에 나 몰라라 했던 이들이 지구상의 어떤 곳들에서 또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분을 위해 눈물 흘렸던 이들, 피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주던 이, 비록 한 순간이었지만,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에 절규하고 싶었지만, 끝내는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이들도 또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수난 복음은 슬픔만을, 절망만을, 실패만을 증언하지는 않는다. 수난복음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는 버림받음의 절규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는 철저한 신뢰의 큰 소리로의 빠스카를 증언한다. 이 증언은 그 빠스카를 가능케 했던 분, 아들의 고통에 온전히 동참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증언이다. 이 세상 어느 곳들에서 또다시 쓰여지고 있는 수난 복음에서도 그분의 현존에 대한 증언이 함께 녹아 있다.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을 훌쩍 넘어서서 그렇게 우리에게로 다가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