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강론)
파파, 프란치스코!
초대 교황,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 바르요나입니다. 즉,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지요. 예수님께서 어부 출신의 시몬을 베드로라고 부르신 것은 그에 대한 특별한 신임과 애정 때문입니다. 그가 세 번이나 배반할 것임을 알고 계셨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시몬을 베드로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에 다시 시몬이라고 부르며 당신의 교회를 맡기시지요. 시몬은 속명이고 죄인의 이름입니다. 굳이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은 부족한 그 모습대로 사랑하신다는 표현이겠지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몬의 자격과 능력이 베드로라는 이름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 안에는 주님의 신뢰와 사랑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죄와 나약함을 보신 것이 아니라 회심하고 난 다음 더 단단해진 그의 가능성을 먼저 보신 것 같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베드로가 한때 죄인이었기 때문에 지금 죄인인 우리들도 위안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완벽한 의인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회개하는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초대 교황, 베드로를 통해서 모든 죄인들을 끌어안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레오 14세 교황님 즉위 후 사무실 벽에 걸려 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 사진을 내리면서 버릴 수 없어 사제관에 따로 모셔두고 있습니다. 평생 간직할 것입니다. 볼 때마다 그분의 삶과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교황주일을 맞이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겸손과 청빈은 이미 익히 들어서 잘 알고 계시겠지만, 교황 선출 당일 성 베드로 광장이 보이는 발코니에서 교황으로서의 첫 강복을 주시기 전에 갑작스레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그들의 주교를 위한 축복을 먼저 청하셨습니다. 교회는 전례와 신앙 활동 안에서 강복을 하는 성직자 외에도 일상에서 서로에게 강복하고 기도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그렇지만 교황의 첫 강복을 받기 위해 모인 이들에게 도리어 축복을 먼저 청하며 기도했다는 것은 기존 관행을 깨는 파격적인 행보였지요.
또 교황님은 선출 당일 저녁 리무진이 아닌 추기경과 같이 소형 버스를 타고 산타 마르타 집으로 향하셨고, 그곳 축하 만찬에서 건배사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농담조로 하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시기를.” 그러니까 추기경들이 자신을 잘 못 뽑았다는 말이지요. 유머가 있으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고백한 대목이라고 봅니다.
교황님의 마지막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3년 전에 미리 작성해 두었던 사후 간소화된 장례 절차와 무덤과 관련된 유언장, 마지막 부활절 미사 강론, 그리고 미사 후 강복하시면서 남기신 “전쟁을 당장 끝내십시오.”라는 말씀일 수 있겠지만, 마음에 와 닿는 마지막 말씀은 연명 치료를 거부하시면서 “아니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달릴 길을 다 달렸고 마지막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셨던 교황님의 모습은 아직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항상 콘클라베 후 새 교황이 선출되면 라틴어로 “하베무스 파팜”이라고 선언됩니다. 뜻은 ‘우리에게는 교황이 있습니다’ 입니다. 역대 교황님들의 즉위와 선종이 반복되어왔지만, 가톨릭교회는 2천 년 역사 안에서 항상 교황이라는 존재가 대를 이어 교회를 떠받치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부디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도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 직분은 하느님께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레오 14세 새 교황님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십시오. 교회의 일치와 쇄신,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일하시는 교황님이 선대 교황님들의 유지를 잘 받들어 더 나은 방향으로 계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 임계점을 앞두고 있는 기후위기, 세계 여러 지역에서의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국제사회와 직면하여 인류의 영적인 스승으로서 가교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선교사 출신인 새 교황님의 말씀을 끝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교리를 가르치려 애를 쓰지만, 예수님을 아는 기쁨과 아름다움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의무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