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삼위일체와 교회
삼위일체 교리는 가톨릭 교리의 핵심이지만 이성으로 이해하기는 가장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교리입니다. 삼신이 아니라 삼위라고 표현하는 것은 가톨릭이 다신교가 아니라 유일신교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일체라는 말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 각각 위격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한 분 하느님이심을 억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르면서도 같다’라는 말은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이성을 추구하는 가톨릭이 삼위일체 교리를 고수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이성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삼위일체를 대상화하여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이 삼위일체 신비 안에 머물러 있을 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교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사랑하고 순명하는 일치의 관계 속으로 우리가 들어갈 때 영적으로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설명 불가능한 신비를 애써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강론자의 한계입니다.
저는 삼위일체 교리를 말하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는 존재인가를 말하고 싶습니다. 성부 하느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라는 말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랑에서 기인합니다. 세상 창조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말하지만, 그 영광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찬미와 감사와 흠숭을 받을 때 영광스럽게 되십니다. 창세기 설화는 세상 창조의 마지막 단계를 인간의 창조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 말은 세상 모든 창조는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인간을 위한 설계이며 준비였다는 것입니다. 가끔 밤하늘의 별을 쳐다봅니다. 그런데 그 별빛은 어쩌면 수십 광년 전에 사라진 별의 흔적일지 모릅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하느님은 인간을 위한 밤하늘의 우주쇼를 준비하셨다는 이야기이지요. 또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화단 안의 예쁜 꽃은 이미 몇 천 년 전부터 여러 과정을 거쳐 준비하신 선물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감탄사는 극히 짧은 순간에 나오는 것이지만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서 대자연의 질서 속에서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성자 하느님,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자이십니다. 세상의 역사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B.C)과 오신 다음(A.D)의 역사로 구분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례 받기 전의 나와 세례 받은 다음의 나로 인생이 구분됩니다.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면 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신이 인간이 되셨다는 말입니까? 물속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려면 밧줄이나 튜브 등을 이용해서 구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소용이 없으면 물에 뛰어들어서 구조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구렁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렁 속으로 뛰어든 분이시며, 죄인들을 구하시고 정작 당신 자신은 그 구렁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자기를 죽이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인간의 처지를 끌어안으신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고통받고 죽는 신이 되신 것입니다. 이 보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끝으로 성령 하느님, 빨라끌리또 성령은 동반자이십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시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또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십니다. 당신의 구원 사명이 교회를 통해서 세상 끝날까지 이어지기를 바라셨던 겁니다. 비록 주님께서는 승천하셨지만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셨습니다. 떠나심의 목적은 더 뜨겁게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성령 하느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사랑하고 그분의 현존을 뜨겁게 체험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은 허물어져도 성령 하느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상 성부와 성령과 성령은 인간을 영원히 사랑하기 위하여 서로 순명하고 협력하며 일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삼위는 한 번도 혼자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항상 바톤을 주고받으며 이어달리기를 하듯이 사랑의 하느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긋는 성호경은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분 안에서 일치하면 우리는 서로 다른 형제들 안에서도 일치할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구성하는 우리 또한 삼위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일치의 삶, 사랑의 삶, 순명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