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선물
오늘은 원래 부활 제2주일이지만, 우리 교구 모든 본당에서는 교황님의 추모 미사로 봉헌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삶과 가르침을 묵상하고 또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마침 지난 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독서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인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이 말을 마치고 베드로 사도가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가 벌떡 일어나게 되었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의 이 구절과 관련하여 교회 안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중세에 가톨릭 교회가 승리와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어느 교황님이 자신의 고백 신부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불구자를 일으키는데, 왜 자신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데도 불구자를 일으켜 세울 수 없는지를 물었습니다. 고백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금도 은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베드로의 후계자는 금도 있고 은도 있고 권력도 있지요.”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야말로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와 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과 은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신 분”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베드로 광장에 모여든 신자들에게 강복하기 전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먼저 청했습니다. 그분은 이기고 설득하기 위해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정치 지도자와 만날 때도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지 않았고, 어떤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할 때도 종교적 교리를 놓고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을 대변했습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우리가 지구의 모든 피조물과 형제자매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하고, 상처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분의 겸손이야말로 참다운 권위였고, 그분의 듣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외침이 되고, 그분의 가난이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하고 지지한 것은 아닙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교황님은 미국 정부와 이태리 정부와 상당한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이민과 난민 문제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지속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는 정부를 비판해 왔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의 입장은 너무나 분명하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2016년 우리나라에 오셨을 때, 계속 세월호 뺏지를 달고 계시자 옆의 누군가가 정치적인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뺏지를 빼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이렇게 교황님은 금과 은이나 또 다른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시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관점에서 교회를 이끄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도 직무 역시 역사의 한페이지가 되었습니다.
교황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닙니다. 교황의 죽음 이후는 교회의 방향을 정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콘클라베”라고 부르는 이 절차를 통해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됩니다. 새로 선출되는 교황 역시 개인이 아닙니다. 그를 통해서 교회가 세상 안에서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이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추모미사를 봉헌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하느님의 크신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그리고 교회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