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다해, 2025년 4월 20일)강론
오늘은 우리 신앙의 정점이며 핵심인 부활 대축일입니다. 2천년 전 오늘 새벽 닫혀버린 무덤이지만 임과 함께 있기 위해 달려온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음을 발견하게 되자 그분의 시체를 누가 옮겼다는 자연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고 이를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이에 엊그제까지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를 세 번이나 배반한 베드로 사도와 다른 제자도 무덤으로 달려와 빈 무덤을 발견하고 주님의 부활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 메시아사상에 젖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출현은 수많은 이들을 가슴 설레게 했습니다. 많은 기적을 보여주시고 병자들을 낫게 해주시며 심지어 죽은 이를 살리시기까지 하신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자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그 메시아로 모시고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도 기대했던 예수께서도 우리 인간들과 똑같이 힘없게 수난을 당하시고 죽어가시는 것을 보고 실망과 좌절을 금치 못했으며 예수를 모른다고 배신하는 비굴함을 보였습니다.
더구나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거나(마르 16,14), 의심하는 사람(마태 28,17)이 있었는가 하면 부질없는 헛소리려니(루가 24,11)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러했던 제자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어느 날부터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그분은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다고 용기있게 외치며 죽음까지 불사하며 순교로서 증언했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정말 인간적으로 나약하고 평범했던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완벽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체험했으며 더구나 성령의 은사까지 받았던 것입니다. 그 체험을 겪고서야 그분이 어떻게 사셨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모든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부활 사건은 이전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로 모이는 정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부활로 인해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고, 죽음도 이제는 우리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단지 이 부활 사건에만 모든 것을 걸 수는 없습니다. 부활의 영광 뒤 그늘에는 십자가상 고통과 죽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만물의 이치도 이를 보여줍니다. 초봄의 파란새싹들이 움트기 위해 씨앗이 땅속에서 죽어야 했고 아름다운 나비가 훨훨 날기 위해 고통스런 애벌레 과정을 거쳐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에는 처절한 자기 성찰과 고통스런 자기비움을 통해 내어주고 낮추고 죽어야 하는 과정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의 근대 소설가 이상은 자신의 저서 ‘날개’에서 겨드랑이가 가려워 ‘날자’라고 했던 것과, 헤르만 헷세는 데미안에서 새가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투쟁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서/한 단계 승화된 존재로 변화됨을 갈망하는 내용들을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또한 다른 의미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 분을 닮겠다고 그 분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내가 이대로는 안된다고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껍질을 벗고 나오는 변화는 고통이 따르겠지만 그 속에 희망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부활이란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던 것처럼 자신을 둘러싼 돌을 치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울타리를 높이 세우고 그 속에 자기를 가두는 사람은 부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예수님을 따라 생명을 향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의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죽은 뒤에 새롭게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증오와 죽음, 폭력과 이기심을 버리고,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부활을 굳게 믿는다면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희망이 샘솟고, 위안과 평화의 힘이 온몸을 감싸는 그러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신앙의 정점이요 일년의 전례력 중에서 가장 큰 축일인 오늘 주님 부활 대축일은 단지 기념하고 축하하라고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체험했던 것처럼 이 시대에 나에게는 어떤 부활체험이 있어야 하며 또한 그 부활체험을 통해 증거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