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주님 수난 성금요일 강론)
참된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영광
오늘 우리는 요한이 전한 수난기를 들었습니다. 해마다 같은 복음인데요, 공관복음과 달리 그만의 특별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에 항상 고정적으로 요한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수난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우선 그리스도는 왕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자신을 포박하러 온 적대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고 몸을 맡기십니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뒷걸음치다 넘어진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적대자들이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뺨을 치던 군사들과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빌라도의 입을 통해 지속적으로 임금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일종의 반어법입니다. 죄와 어둠 속에 있는 유다인들은 예수님에게 온갖 모함과 독설을 퍼붓지만 무죄와 빛 속에서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임금의 품위에 맞게 그들과 상대하지 않고 침묵으로써 진리를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빌라도가 쓴 죄명패 ‘유다인들의 왕 나자렛 예수’는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적혔다고 했는데, 여기서 각 각의 히브리 단어들의 첫 모음과 자음을 조합하면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 ‘야훼’가 됩니다. 즉,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을 빌라도의 손을 통해서 만천하에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참된 임금으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영광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영광은 권력과 부와 명예가 아니라 사랑과 겸손과 용서의 영광이었습니다. 참된 임금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처지에 함께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분께서는 비천한 인간으로 오셔서 온몸으로 고통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참된 임금이라면 용상에서 지시만 하고 보고만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용상에서 내려와 백성과 함께 걷고, 백성과 동고동락하며, 백성의 운명을 함께 짊어지는 왕이 진짜 왕입니다. 공생활 중에 그리스도는 그렇게 사셨고 이제 그분께서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로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십니다. 임금이신 그분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희생 제사로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불신자들에게 십자가는 저주와 실패의 표상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승리와 영광의 징표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임금으로서 마지막 한 마디로 당신의 모든 말씀을 완성하십니다. “다 이루어졌다.” 당신의 죽음으로써 옛 계약이 완성되었고, 새 계약 속에서 당신의 백성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과거에 한 번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경배를 통해서 수난 가운데 찬란히 빛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