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어린양
요한 복음에서는 여러 차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요한 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하고 소개합니다. 이 말 자체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린양”은 “희생양”을 의미합니다. 희생양이란 공동체가 어떤 위기 상황을 맞이했을 때, 책임을 대신 지는 사람이나 대상을 뜻합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희생양은 공동체 전제의 집단적인 회개와 속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속죄의 날에 염소 두 마리를 잡아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공동체의 죄를 뒤집어 씌워서 광야로 내쫓았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은 유대인과 동성애자를 박해함으로써 자신들의 전쟁과 민족적 우월성을 정당화하고자 했고, 일제 제국주의는 관동대지진의 책임을 조선인들에게 몰아서 자신들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희생양은 공동체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인간 내면에는 소수의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존속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부른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희생양과 같은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수난기에서도 대사제 카야파의 말이 언급됩니다. 카야파는 유다인들에게 백성을 위해서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충고했습니다. 백성 전체를 위해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희생양의 죽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어린양”은 “파스카 어린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탈출하기 전, 죽음의 재앙이 이집트 전역을 덮칩니다. 죽음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자기집 문설주에 바릅니다. 어린양의 죽음,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고,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게 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 때 속죄제물로 바치는 어린양을 잡는 시간에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할 파스카 어린양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이 말은 첫째로 예수님은 희생양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두의 죄 때문에, 모두의 죄를 뒤집어쓰고, 모두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희생양이십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파스카의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 죽음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대속의 죽음이요, 우리의 생명을 위한 죽음,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죽음을 함께 묵상하며,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식을 정성껏 봉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