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사순 제5주일 강론)

 

자비와 비참의 만남

 

율법에 따르면 간음하는 사람은 모두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음은 예언서에 자주 우상숭배에 은유될 만큼 큰 죄였습니다. 또한 십계명에 두 번이나 언급될 만큼(6계명, 9계명) 간음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파기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부간의 신의를 저버리는 죄일 뿐만 아니라 혈통을 중시하는 당시 사회에서 사생아를 낳을 수 있어 가정을 파괴하고 성윤리를 타락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투석형은 구약의 전통을 따르는 현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지금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투석형의 과정은 잔인합니다. 마을의 공개적인 장소에서 주민들이 간음한 죄인들을 향해 자신들이 들고 온 돌을 던집니다.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는 못 도망가게 몸을 땅에 묻고, 머리에 천을 씌운 다음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피 흘리며 죽을 때까지 마구 돌을 던집니다. 돈을 던진다고 바로 죽지 않기 때문에 천천히 온몸에 피멍이 드는 고통을 주면서 극도의 공포와 수치심 속에서 비참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형벌입니다. 그래서 가끔 투석형을 선고받은 이슬람의 여인들은 자결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두고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시게 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평소 죄인들의 용서를 설파하신 터라 살리라 하면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이고, 죽이라 하면 당신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예수님은 함정에 빠지게 되고, 결국 고소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그 딜레마를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해결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틀에 갇혀 사는 군중들에게 계명의 근본적인 정신이 무엇인지를 설파하신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법은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만 심판합니다. 의도했으나 적극적으로 행위하지 않았다면 처벌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불순한 마음을 먹고 생각으로 죄지은 것까지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율법만 지키면 모든 것이 의롭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하느님의 입장에서 율법을 재해석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오장육부까지도 훤히 내다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에게는 죄를 짓고 은폐할 수 있지만, 하느님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라고 했습니다. 결과로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동기만 가지고 있어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간음한 여인을 둘러싼 군중들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마음으로 간음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습니까? 그리고 발각만 되지 않았을 뿐 서로 합의 간통을 했든 위력으로 일방적으로 간통했든 고발되지 않는 죄가 얼마나 많은지 누가 알겠습니까? 예수님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라는 말씀은 간음녀의 죄를 두둔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누구를 단죄하기 전에 드러나지 않은 나의 숨은 죄를 반성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떠올리라는 말씀입니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대노하고 질타하면서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왜 합리화하고 미화합니까?

 

한편 예수님은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이 정적이 흐르는 시간에 군중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이제 예수님은 군중들로 하여금 간음녀에 대한 분노의 시선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의 시선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아마도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신 것은 둘러싸인 군중들의 숨겨진 과오가 아니었을까요? 나이가 많을수록 먼저 자리를 떠났다는 것은 살아온 세월만큼 쌓인 죄가 많다는 자기 성찰의 결과가 아닐까요?

 

아무튼 오늘 투석형 직전의 간음녀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묵상거리를 제공합니다. 예수님과 간음녀의 만남은 자비와 비참의 만남이었고, 그 순간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죄를 짓고 생명이 위태로운 그 여인에게 참 빛과 생명을 되찾아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아마도 그 여인은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평생 회개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활하게도 알몸으로 달아간 그 간음남은 비록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평생 자신의 죄를 숨기며 죄책감 속에서 살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는 결국 어둠과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율법이 구형하는 벌은 피했지만, 하느님이 내리시는 최후의 심판과 영벌은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의롭다했지만 가장 추악하고 비겁한 위선자였기 때문에 그 벌이 더 컸을 겁니다. , 지금 나의 검지 손가락은 누구를 가리키고 있습니까? 내 자신입니까? 아니면 내가 단죄한 그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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