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8,1-11
바리사이들은 이미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릴 궁리를 여러차례한 이들입니다. 이번에야말로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려들게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 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변호하신다면 율법을 어기는 셈이 되고, 여인을 죄인으로 단죄하신다면 지금까지 선포한 용서와 자비의 복음과는 크게 어긋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들은 여지없이 참패를 당하고 물러납니다.
예수님의 움직임을 살펴봅시다.
고소인들을 그대로 세워 둔 채 그분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이에 대한 안셀름 그륀 신부의 해설을 들어봅시다.
「그들을 생각하도록 만들고, 그분 자신도 당신의 내면에서 창조적 대답을 얻기 위해 시간을 버시는 듯하다.
그들의 선동적인 말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침묵 가운데 당신의 깊은 내면에 이르신다.
자신의 중심, 자신의 자아를 만나는 사람은 해결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율사들을 불안에 떨게 하신다. 그들 자신의 부족을 바라보게 하신다.
그리고 각자의 마음을 찌르는 한마디 말씀을 들려주신다.
"당신들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시오.(7절)"
이 말씀을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신다. 각자를 자기 양심에 맡기신다.
여인을 단죄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진리와 대면하게 하신다.
그들은 이 단순한 말씀의 무게를 피할 수 없다. 아마 몇몇 사람들은 예수의 등 뒤에서 은밀하게 돌을 집어 들고 간음한 여인에게 던지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 사람은 없다.
유다인의 관습에 따르면 첫 증인들이 맨 먼저 돌을 던진다.
이로써 첫 증인들이 형집행의 책임을 전적으로 지게 된다. 그러니까 이런 책임을 아무도 지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런 유다인의 관습에다
다른 사람을 단죄하려는 증인은 먼저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달았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 묵상 113-120 p 참조>
이제 하나 둘씩 떠나버리고 예수님과 죄녀만 남았습니다. 그다음 이어지는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는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치욕(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단죄를 받는)과 죽음의 문턱까지 간 그녀에게 묻습니다.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면 이번 죄는 덮어 두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조건없는 용서입니다.
이 자비의 체험이 그녀를 죄악의 사슬(영원한 죽음)에서 구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