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사순 제4주일 강론

by 주임신부1004 posted Apr 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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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사순 제4주일 강론)

 

시선의 차이

 

오늘은 장미주일입니다. 이제 부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심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순 중턱을 넘어선 오늘 우리는 과연 부활을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있는지, 내적 회심과 변화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 보겠습니다. ·구약 할 것 없이 성경은 하느님을 아버지, 그것도 어머니 같은 자비로운 아버지로 묘사하고,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래서 불효하는 자녀로 묘사합니다. 이렇게 대비가 분명할진대, 하느님은 항상 무모하게도 인간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는 데는 형평성이니 합리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먼저 오늘 제1독서 여호수아기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돌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를 일용할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이제 모세 시대가 끝나고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그 땅의 소출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양식으로 주십니다. 마치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다가 어느 정도 씹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이유식을 먹이듯이 말입니다. 엄마는 아기를 굶기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사랑하는 아기에게서 자신의 시선을 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시도 눈을 떼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 배은망덕하게 굴어도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보시기 전에 그들의 결핍과 나약함을 먼저 보셨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항상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복음, 루카 복음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봅시다. 복음의 등장하는 아버지는 참 어리석습니다. 작은아들이 배신하고 탕진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소중한 재산을 넘겨줍니다. 이때 아들의 시선은 아버지가 아니라 오직 유산에만 꽂혀 있었습니다. 살아생전에 아들에게 유산을 주지 않는 것이 당시 일반적인 관례인데, 아버지는 어리석게도 아들에게 평생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일군 재산을 조건 없이 물려 줍니다. 결국 다 아는 스토리인데, 작은아들은 그 재산을 다 탕진합니다. 그것도 아주 나쁜 방식으로 아버지의 피와 살과 같은 유산을 모두 날려 버립니다. 그리고 곧 거지가 됩니다. 나락으로 떨어진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그리워서라기보다 염치는 없지만 빌어먹을 생각으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아들은 필요할 때만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유산을 받아 갈 때도 그랬고, 거지가 되어 살 궁리를 찾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용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작은아들이 집을 나가기 전에도, 집을 나간 후에도, 그리고 집에 다시 돌아온 후에도 항상 시선은 그 아들에게 머물렀습니다. 아들의 잘잘못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위험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밥은 굶고 있지 않는지, 다친 데는 없는지 항상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행여 늦은 밤에 몰래 집에 들어올 수도 있으니 항상 대문을 열어 놓고 주무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언제 오려나 하고 매일 같이 동구박에서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돌아오던 날, 젊고 시력이 좋은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발견한 것이 아니라 늙고 시력이 형편없는 아버지가 멀리서 고개를 숙이고 거지꼴이 되어 오고 있는 아들을 먼저 발견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노안을 천리안으로 만든 것입니다. 또 그 아버지는 자신을 배신하고 재산을 탕진한 망나니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온 아들이라며 기뻐하고 축제를 벌입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자신의 명예보다, 또 자신의 재산보다 더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배척하며 인연을 끊고자 하는 큰아들도 사랑하십니다. 큰아들이든 작은아들이든 아버지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다 같은 자식인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항상 우리를 먹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어머니 같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떨까요? 지금 제대 위에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언제 십자가를 바라봅니까? 사실 평상시에는 쳐다보지 않다가 나에게 위험이 닥쳤을 때, 어려움이 생겼을 때, 도움이 간절히 필요할 때, 그때 비로소 찾지 않습니까? 평소 시선은 다른 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한 번도 우리에게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행복할 때도, 우리가 불행할 때도, 우리가 성할 때도, 우리가 아플 때도 항상 거기에 계셨습니다. 우리의 수많은 죄를 보시고도 당신의 고개를 돌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를 애처롭게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우적거릴 때 멀리 계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하시며 고통을 나누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2천 년 전의 역사적 기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항상 나를 위해 고통당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쩌면 내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주님께 원망하며 욕을 할 때도 주님은 말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며 또다시 나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겠지요. ‘괜찮니? 많이 아프겠구나. 하지만 나와 함께 다시 일어나자꾸나. 나도 아프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단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잠시 성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