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주님 봉헌 축일 강론)

 

참된 봉헌 생활

 

유다인들은 모든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율법에 따라 성전에 봉헌되었습니다. 이때 사용되는 제물은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였습니다. 일반 서민들에게 허용된 제물이었는데, 예수님의 부모도 살림이 넉넉지 못하여 이 관행을 그대로 따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었다는 것은 명실공히 이제부터 유다교 전통을 따르는 유다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봉헌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언자 시메온을 통해서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가 오셨음을 공표하는 것은 물론 구원의 빛이 유다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비추고 있다고 예언합니다. 그리고 성모님께 아들 예수 때문에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이라고예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양극단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메시아로서 지니는 영광이고, 다른 하나는 메시아로서 겪게 될 수난입니다. 그러나 이 양극단은 사실 하나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봉헌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예수님께서 짊어져야 할 구원의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일반 유다인들에게 성전 봉헌은 경사스런 날인데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길! 아기도, 아기의 부모도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은 기쁘면서도 슬픈 날이고, 축하하면서도 경건하게 보내야 합니다.

 

한편 오늘은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성직자들에게는 사제 성화의 날이 있다면, 수도자들에게 축성 생활의 날이 있습니다. 축성 생활은 가난, 정결, 순명의 세 가지 복음적 권고의 의무를 받아들이는 삶을 말합니다. 우선 가난은 물질적 가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난을 본받아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비워내는 삶을 말합니다. 또 정결은 독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갈라짐 없이 오로지 신랑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끝으로 순명은 수도회 장상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소임과 사익에도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과 공동체의 선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말씀처럼 영원히 머물 것처럼 소임지에서 최선을 다하고, 내일 바로 떠날 것처럼 사람과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복음삼덕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가난은 악입니다. 요즘 갈수록 독신주의자가 증가하고 있지만, 세상과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인 독신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순명은 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쾌쾌묵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말합니다. 책임보다는 권리가, 순명보다는 자기주장이 강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복음삼덕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평생을 가난하게 사셨고(십자가에서 팬티 한 장도 못 건짐),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와 영적인 가족을 위해서 독신을 선택하셨으며,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며 수난과 죽음의 잔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십니다. 가난, 정결, 순명! 이 세 가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덕목입니다. 100% 모방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복음삼덕의 지향점을 가지고 살아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재속회 회원들도 있습니다. 이미 기혼자이고 경제생활을 하고 있지만, 평신도로서 복음삼덕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디 재속회 회원들이 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아 교우 여러분들도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해야 할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을 봉헌한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제대초만 봉헌하지 말고 초가 자신을 태워 주위를 비추듯이 희생적인 내 삶을 봉헌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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