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죽음의 철학’ -
르네상스, 근대에 크게 부각되는 주체성, 자아, 인격적 개인성에 대해 중세 후기 시대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게 되었을 때, 이러한 자아의 탄생은 종교심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죽음에 있어서 어떤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는가?
‘자아의 탄생’은 종교심에도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신앙은 이제 단지 집단적인
소속감의 차원이 아니라 고유한 나의 삶이 지닌 의미에 대한 물음과 연결되고,
나와 신과의 내밀한 만남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된다.
중세 그리스도교 문화와 영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아르스 모리엔디는
근본적으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죽음의 준비는 좋은 삶의 튼튼한 기초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교의 ‘아르스 모리엔디’는 큰 깨달음과 영감을 줄 수 있다.
소크라테스에서 비롯된 전통에서 보면, ‘죽음의 명상’은
죽음의 의미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에 이르며 죽음이 주는 ‘선익’을 깨닫고,
죽음을 수용하며, 죽음의 명상을 통해 오히려 내면의 평화라는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감정 상태에 머무는 것을 지향한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명상은 개념의 분석과 이해에 그칠 수 없다.
죽음의 명상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의미하는 ‘죽음의 연습’과 분리될 수 없다.
영혼 불멸에 관하여 에토스의 방식으로 설명할 때, 죽음은 육체적이고 지상적인 삶에서 해방되는 것이지만 죽음을 준비하고 연습하는 것이 삶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좋은 삶을 향한 도전의 의미가 되며,
죽음을 의식하고 명상하는 것은 실천적 활동에서 물러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혜의 인식으로부터 시작되는 윤리적 실천의 더 높은 차원의 동기를 지니게 한다.
동시에 죽음의 의미를 인식하고 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지상에서 육신과 감각을 통해 영위하는 무상하며 유한하며 소멸하고, 고통과 쾌락에 종속된 삶과는 다른, 순수하며 온전하고 영원한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죽음을 통해 육체에서 풀려난 영혼이 결국 소멸하거나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통해 육체에서 풀려난 영혼이 결국은 소멸하거나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의심은 당시 대중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두려움을 윤리적 실천 속에서 서서히 조형되는 희망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소크라테스는 최선을 다해 윤리적으로 좋은 삶을 살고자 애쓴 사람이라면 불멸하는 영혼에 대해 희망하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인물됨 자체를 통해 보여 준다.
『파이돈』에서, 로고스를 통하여 영혼 불멸을 증명하려고 할 때 소크라테스 자신이 이 논증들에 때로 거리를 취하는 인상을 주기도 하고,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논거들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러한 문학적 장치는 ‘로고스’만을 통해 ‘영혼 불멸’을 완전히 증명하고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해 논증하고 토론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통해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로고스를 통한 접근하는 노력을 포기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 역시 배우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정화라고 가르친다. 영혼과 육신의 관계에 기초하여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정화(catharsis, 카타르시스)라고 가르친다.( 『파이돈』 69b 참조) 우리는 여기에서 소크라테스가 평생에 걸쳐 깨닫고 실천한 ‘죽음에 대한 명상’과 ‘죽음의 연습’의 존재론적 기초를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영혼이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정화의 개념은 영혼과 육신의 관계에 기초한다.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시도하는 죽음에 대한 이해는 육신과 구분되는 영혼의 관념을 전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 영혼은 지상의 삶에서는 감각과 격정과 욕망의 원천인 육신과
결합되어 있지만, 본디 육신과는 구분되는 원리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승의 삶에서 인간의 영혼은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라고까지 말한다.
영혼이 육신의 원리에 물들어 버리거나 익숙해지는 대신에 육신으로부터 부단히 자유로워지고 해방되어 가는 것이 ‘철학자’의 삶의 방식이 된다.
육신에서 벗어나는 것을 ‘정화’라고 부른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는 것이기에, 죽음은 정화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죽음을 배우는 것’이며, 철학자에게 죽음이란 평생 해 오던 일을 이제 완성하게 되는 사건일 것이라 말한다.
그러기에 철학자라면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기다리는 것이 맞지 않는가 하고,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생명이
신으로부터 부여된 선물이자 사명이고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이 자의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라는 전통적인 종교심에 확고하게 동의한다.
그러기에 철학자의 임무이자 본분은 다가온 죽음에 대해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에토스와 관련하여, 영혼 불멸은 죽음의 의미를 인식하고 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지상에서 좋은 삶을 위하여 노력할 뿐만 아니라)
‘영혼 불멸’에 대한 희망은 좋은 삶을 향한 도덕적 수양과 실천이라는 윤리적 차원과 지상을 넘어선 가장 깊고 순수한 세계에 대한 갈망이라는 종교적 차원을 포괄한다.
영혼 불멸에 대한 희망은 두 차원으로 포괄한다 하겠다.
플라톤은 ‘영혼 불멸’의 희망 안에 철학적 사유와 실천, 종교적 경건과 갈망이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완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파이돈』에서 서서히 등장하는 순수한 형상(이데아)의 세계라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아직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실천의 영역에서만 통합되어 있던 윤리학과 종교성을 존재의 차원에서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킨다.
영혼의 불멸은 인간이 현상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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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는 '죽음의 기예'라는 뜻.
아르스 비벤디(Ars Vivendi)는 '삶의 기예'라는 뜻.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신과 사람과 일에 관하여 실천적인 삶의 기술을 통해서 지혜를 얻었다.
진정한 지혜는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신에게 부여 받은 이 땅에서의 삶을 이웃과 더불어 잘 가꾸고 누리며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차원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이며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기에 창조적이고 생명 넘치는 삶의 (기예)기술과 지혜 가 필요하다.
로고스(logos)
사물의 존재를 한정하는 보편적인 법칙, 행위가 따라야 할 준칙, 이 법칙과 준칙을 인식하고 이를 따르는 분별과 이성(理性)을 뜻한다.
그리스도교 사상에서의 로고스는 세계창조에서의 신의 사상내용이며 제2의 위격(位格)인 ‘아들’이다. 이들 사상은 후세의 유럽 철학에 오래도록 많은 영향을 끼쳤다.
뮈토스(Mythos)
이성과 진리의 언어인 로고스와 달리, 아득한 과거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전해 주는 신화의 언어. 넒은 의미에서는 시를 비롯한 문학과 예술의 언어를 가리키기도 한다.
삶의 의미
결론은 삶의 의미이다.
의미 있게 사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해방된 삶을 사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뮈토스와 로고스는 서로 대립한다기보다 존재의 근본을 찾아가고 인간의 삶의 의미를 찾는 두 가지 방법이다. 둘은 상호보완적이다.
에토스(ethos)
‘성격’, ‘관습’ 등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다.
20세기까지는 '특질'로 번역하여 사용하기도 했으나[1], 현재는 외래어로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에토스라는 단어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에토스는 화자(話者) 고유 성품을 뜻한다.
체형, 자세, 옷차림, 목소리, 단어선택, 시선, 성실, 신뢰, 카리스마 등이 에토스에 속한다.
오늘날 이 단어는 민족 혹은 사회별로 특징지어지는 관습 혹은 특징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출처 : 서울 교리신학원 /신학편지 리포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