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일 목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세례식 때 이런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는다. «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 », « 신앙을 청합니다 ». «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 », «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 이 질문과 답변이 끝나면, 사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불사 불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것은 동일한 의미다. 성경에는 « 안다 »라는 동사가 몇 번 나오는데, 이 단어는 합일, 하나됨과 연관된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기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을 때, 마리아는 «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라고 대답했다.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이 말은 ‘남자와 합일을 해본 적이 없다’, ‘남자 안에 머무른 적이 없다’라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를 수 있을까 ?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청빈, 겸손, 그리고 순명을 통해 이뤄진다고 가르친다. 이 3가지 덕행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사랑의 길에 다름 아니다. 사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이 진리 자체가 하느님의 청빈, 겸손, 순명을 드러낸다.
청빈, 겸손, 순명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의복에서도 잘 드러난다. 성직자의 옷인 수단은 청빈, 겸손, 순명을 드러낸다. 까만 수단에 흰색의 로만 칼라는 청빈을 상징한다. 의복에서 가장 잘 닳는 부분이 목덜미와 소매와 수단의 끝단이다. 목덜미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직자들은 광목으로 된 흰 천을 둘렀다. 그것이 바로 로만칼라의 효시이다. 그리고 소매부분도 잘 닳는 부분이다. 수단의 소매에는 얼핏 보면, 주머니처럼 사용 가능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소매가 닳으면, 그 부분을 내려서 소매를 수선하는데 사용하기 위한 여분의 천이다. 그리고 수단의 끝단이 닳으면, 예전에는 거기에다가 레이스를 달아서 사용했다. 오늘날에는 레이스가 장식을 위해 주로 사용되지만, 사실, 레이스는 닳은 의복의 끝단을 수선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수단은 그 자체로 청빈을 드러낸다. 사실 청빈해야, 겸손할 수 있고, 겸손해야 순명 할 수 있다.
청빈, 겸손, 순명이 성직자와 수도자들만이 걸어가는 길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그러나 청빈, 겸손, 순명은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니다. 청빈, 겸손, 순명은 하느님과 하나되기 위한,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한 방편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 이야기를 들었다. 세례자 요한은 청빈, 겸손, 순명의 모범이다. 광야에서 살면서,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야생의 벌꿀을 먹으며 살았던 요한은 그 삶 자체가 청빈의 삶이었다. 청빈했기 때문에, 겸손할 수 있었다. 가진 자는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겸손할 수 없다. 겸손하지 않은 자는 결코 순명 할 수도 없다.
그저 고개 수그리거나 읊조리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거짓 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되돌아가는 존재인 인간의 미소함,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런 자신을 꾸밈없이 하느님 앞에, 사람들 앞에 내 보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꾸밈없이 거짓 없이,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었다. 그러한 자기 드러냄은 세례자 요한을 겸손한 사람인 동시에, 의로운 사람이 되게 했고, 마침내는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전하는 사람, 바로 예언자가 되게 했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청빈, 겸손, 순명의 삶을 마치 시대에 맞지 않는 삶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끊임없는 소비문화와 향락문화, 하느님께 삶의 가치와 기준을 두기 보다는 인간의 지식, 기술, 물질에 더 큰 가치와 기준을 두는 문화, 한마디로 생명보다는 죽음을 향해 치달아 가는 시대에서 청빈, 겸손, 순명은 참으로 어리석은 길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저 나의 복과 성공, 내 가족의 안녕과 마음의 평온을 얻으려는 기복신앙에 젖어 쉽고 넓은 길을 찾으려고 하는 어중이 떠중이 신앙인들에게도 청빈, 겸손, 순명은 고단한 길로 여겨진다.
청빈, 겸손, 순명의 길은 분명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청빈하고, 겸손하고, 순명 할 때에, 예수님처럼, 세례자 요한처럼, 그분들의 삶을 본받으려 했던 수많은 성인성녀들처럼, 불의를 거부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더불어 함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길, 하늘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나에게 이렇게 다가 온다.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