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

 

마고이들의 경배

 

공현이라는 말은 한자말로 공적인 , 나타날 을 써서 공적으로 드러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랍어로 에피파니아라고 하는데, 이는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여 공적으로 온 누리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공현 대축일 때는 항상 동방 박사들이 등장합니다. 동방박사는 그리스어로 마고이를 번역한 말인데, 박사 외에도 천문학자, 현자, 왕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연의 빛인 별을 따라서 참된 빛이신 그리스도께 경배하러 온 동방의 선지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실제 마고이는 당시 시대적 배경 속에는 속국 왕들의 가신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이들은 왕국의 중대사를 왕과 함께 논의했던 측근 참모들입니다. 그리고 제국에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거나 황태자가 태어나면 자신의 왕들을 대신하여 황제에게 알현하며 조공을 바치곤 했습니다. 일종의 사신들이지요. 따라서 동방 박사의 방문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이방 사신들의 알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상상이 더 해져서 동방 박사들은 세 명이 되었고, 각자 다른 출신 지역과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이들을 삼왕이라고 불렀는데,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한 최초의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전 세계 인류의 대표라는 의미에서 각각 백인, 흑인, 황인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멜키오르가 백인, 발타사르가 흑인, 가스파르가 황인으로 묘사됩니다. 이제 주님은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자가 되십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것이 주님 공현 대축일인 것입니다.

 

한편 그들이 들고 온 선물은 황금, 유향, 몰약이었습니다. 이를 암시하듯 제1 독서 이사야서에서는 황금과 유향이 등장합니다. 이것들은 귀하고 값비싼 선물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에서는 황금과 유향 외에도 몰약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몰약은 염할 때 바르는 방부액인데, 가격이 비싼 것은 알겠지만 왜 갓 태어난 아기에게 죽음을 뜻하는 몰약을 선물했을까요?

 

구유 셋트를 자세히 들여다 보세요. 마리아와 요셉에 비해서 아기 예수님이 너무나 큽니다. 성모님이 우량아가 아니라 거인을 낳은 것이지요. 그리고 포대기에 싸여 있는데 추운 동굴 마구간에서 아기를 그렇게 방한했다가는 얼어 죽습니다. 실제 모습은 찬 바람이 살을 파고들지 못하도록 헝겊 같은 천으로 칭칭 감았을 것입니다. 꼭 미라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 속에서 교부들은 아기가 장차 커서 이룰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상징하는 몰약은 경배 예물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이런 몰약에 대한 묵상은 황금과 유향에 대한 의미도 다르게 이해하게 해 줍니다. 황금은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상징하는데, 그 영광은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유향은 제사 때 쓰는 향인데, 분향은 하느님께 올려 드리는 우리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분향은 항상 대축일 미사 때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사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아닙니까? 이렇게 황금과 유향은 죽음을 상징하는 몰약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미사 중 예물 기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이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아니라, 그 예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봉헌하고 받아 모시오니, 저희가 바치는 이 제물을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받아들이소서.”

 

따라서 오늘 예물기도처럼 주님 공현 대축일에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제물로 봉헌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 공현은 365일 미사성제를 통하여 이뤄집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 미사를 통해 온 누리에 그리스도만이 참된 왕이시라고 선포되는 것입니다.

 

, 이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받으신 주님을 미사 때마다 제물로 항상 봉헌하고 있으니, 우리는 무엇을 봉헌해야 할까요? 기도와 희생, 봉사와 나눔, 사랑과 정의, 그리고 주일헌금과 교무금. 물론 이러한 것들도 중요합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내가 봉헌해야 할 것은 내 자신입니다. 성체성사 때 이뤄지는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나는 내 자신을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진정한 사랑과 흠숭과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온 마음으로 바치는 최고의 경배 선물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것들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봉헌 생활을 돌아보도록 합시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봉헌하신 주님께 우리는 무엇을 드려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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