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9일 월요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 미사 강론
성모님을 생각할 때면, 나는 늘 먼저 가슴이 저민다.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많은 행복을 희생한 여인, 얼굴에 깊게 주름이 패인 한 많은 여인, 억척같이 살다 가족들로부터 못된 며느리, 못된 아내, 못된 어머니로 오해 받으며 살아온 이 땅의 절대다수의 어머니들이 떠오른다. 아들 예수님과 함께 하신 33년이라는 시간 동안 늘 가슴 졸이며 사셨던 당신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어머니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우리 김해성당 본당의 날을 맞이하고 있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나 곰에게서 태어났다는 단군 왕검에게나 한 나라의 시조(始祖)에 대한 일종의 신성화 작업은 어느 민족에게나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 출신성분도 일반인들과는 다른 신적인 요소를 개입시키고 또 구체적인 그의 부모나 형제들은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마치 하늘로부터 툭 떨어진 천상의 존재이기에 그는 황제(皇帝)라 불릴 수 있고, 심하게는 천제(天帝)라고까지 행세한다.
그들은 모두 땅에 살면서도 인간 행세가 아니라 신 행세를 한다. 왕이라 불리었고 절대 권력을 행사했으며 그 말 한 마디에 숱한 사람들은 전쟁터에 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신으로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 땅에 임하셔서 톡톡히 왕 노릇을 하신 신들, 그 시조분들 모두 신답지 않게 죽었다. 사라지고 말았다. 인간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는 그분들께옵서는 하나같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인간사 고락과 함께 당신들도 흥했다가 죽고 또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도 얼핏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면, 이런 신화 중의 하나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천사가 등장하고 또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어날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밝히는 천사는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내용에서 여기까지만 읽은 사람들은 박혁거세나 단군왕검 같은 ‘신화’와 별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똑같이 하늘에서 왔고, 곰이나 알에서 나온 것처럼, 성령에 의해서 잉태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처럼 굳어질 우려가 다분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반전이 이루어진다. 예수라는 그리스도의 출생 역시 그렇고 그런 신화라고 단정지어버리기에는 아주 애매한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마리아라는 존재다.
그녀는 분명 구체적인 한 인간이다. 아기를 가질 수 있는 조건, 자궁을 가진 여자였고, 임신이 가능한 처녀였다. 그녀는 알도 아니고 곰도 아니었다. 한 사람이었다. 바로 이 한 사람 안에 일어났던 놀라운 변화가 일반적인 신화와의 차별성을 지니게 한다.
이 세상에 떠돌고 있는 수많은 신화나 전설에서 신이 신으로서 이 세상에 임재한 경우는 비일비재했지만, 그리고 지금도 자신들이 신이라고 하는 ‘자칭 하느님’들은 많지만, 신이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 오기 위하여 인간의 자궁을 빌리겠다는 말은 예수의 탄생 이야기 이전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신이 인간이 된다, 더 이상 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호사를 포기하고, 신으로서 지닌 권능과 권위를 포기하고, 모든 죄와 악의 굴레를 뒤집어쓴 100%의 인간이 되어, 그것도 가장 비천한, 가장 작고, 가장 서러우며, 가장 억울한 인간의 모습을 기꺼이 선택했다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결코 신화가 아니다. 신화는 말 그대로 신이 된(化) 이야기인데, 마리아라는 인간을 통하여 이루어진 이 이야기는 더 이상 신화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화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사랑해서 너무도 사랑해서, 신으로서의 호사를 누리고 공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신 죽고 대신 속죄하여 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철저한 인간화의 시작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들었던 복음의 이야기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에서 마리아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으로서는 죽고 하느님으로만 살 것을 수용한다. 인간적인 면으로 이제 마리아라는 인간은 죽는다. 애비 없는 자식에, 언제 죽을지도 모를 위태로움과 또 육체적 즐거움의 이별과 십자가 길을 향한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어머니로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리아는 온전히 죽는다. 그러나 인간 마리아가 죽자 마리아 속에 현존하시던 하느님이 살게 된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기념하는 오늘 복음의 백미가 바로 이것이다. 하느님이면서도 더 이상 하느님이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인간이 되어 오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이면서도 더 이상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내는 인간의 선택, 그 <아멘>이 바로 오늘 복음의 백미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알에서 나왔다는 박혁거세나 곰에게서 나왔다는 단군왕검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신비다. 신화가 아니다. 이 모든 신비는 마리아 덕분이었다. 인간 때문에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 이제는 마리아 때문에 하느님이 하느님으로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인간적인 판단과 계산이 죽은 자리에 하느님의 판단과 하느님의 계산이 들어 간 사건, 이것이 마리아의 동정 잉태 사건이며, 이 사건이 바로 신화가 아니라 신비인 것이다. 이를 두고, 레오 교황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위하신 분이 비천을, 권능을 지니신 분이 연약함을 취하시며, 영원하신 분이 죽음을 입으셨습니다. 고통 받으실 수 없는 분이 우리의 실추된 상태의 빚을 갚기 위해서 고통 받는 인간과 결합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동일한 중재자이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죽으실 수 있지만 하느님으로서는 죽으실 수 없으므로 우리 구원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레오 교황의 편지에서, 『성무일도』제2권, p.1568)
하느님이 더 이상 하느님 행세를 놓으시고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이라면, 그 하느님이 인간이실 수 있도록 더 이상 인간적인 것을 고집하지 아니하고 하느님적인 것을 기꺼이 수용해내려는 인간과 만나야, 그 구원사업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다. 구원은 물론 하느님의 의지이고 영역이고,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인간의 <아멘>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리아의 <아멘>이 하느님의 이 세상의 구원을 향한 땀 흘리심을 시작하게 했듯이, 우리의 아멘이 나의 구원을,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킨다.
하느님을 내 삶의 주인님, 마님으로 받아들이고, 그 하느님이 바라시는 삶, 경천애인의 삶, 사랑의 삶을 내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내 길이라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삶, 그 삶이 바로 ‘아멘’의 삶이다. 혹시 나는 내 뜻에, 내가 바라는 것에 하느님이 ‘아멘’ 하시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김해성당 본당의 날을 맞으면서, 우리들 모두가 내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 경천애인을, 내 욕심을 채우기 보다는 하느님의 마음, 곧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이치로 다스린다는 홍익인간 재세이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2024년 12월을 잘 마무리 짓고, 2025년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길이 아니겠나 싶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