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성경에는 본받고 싶은 인물들이 나오는가 하면, 사람의 탈을 쓰고 세상에 나기는 했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인물들, 결코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들, 심지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인물들도 나온다.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헤로데라는 인물이 2천년 전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권력이라는 것,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고, 모든 것을 다 쥐고 흔들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강력한 것으로 내비친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권력의 속성은 참으로 비참하리만치 매정하다.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 그 “누구나”를 매도해버리거나, 그 “누구나”의 손발을 잘라버리거나, 그 “누구나”를 제거해야, 비로소 권력을 움켜 쥘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권력을 쥔 자의 불안을 폭로한다. 이스라엘의 왕이 났다고 하자, 그 일대의 모든 두세 살박이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만큼, 불안에 시달렸던 헤로데 대왕의 아들, 오늘 복음의 등장 인물, 헤로데 안티파스다. 오늘 복음은 ‘시대의 바른 소리’인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죽여 버리고는 전전 긍긍하다가, 다시 그 예언자가 살아 났다는 소문에, 자신이 죽였던 그 세례자 요한의 환영에 시달리며 불안에 떠는 헤로데 안티파스를 폭로한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권력에 미친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불안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세상의 권력이라는 것이 이렇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도덕, 윤리가 통하지 않는 것이 세상의 권력이 가진 속성이다. 수세에 몰린다고, 누리고 있는 권력 절대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갖 방법들을 동원해서, 심지어 국가정보기관과 검찰까지도 쥐락펴락해대는 작태를 보이는 것이 권력이라는 마귀에 들린 것들이 해대는 비열한 짓거리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권력자도 아니고, 권력을 움켜 쥐어 보려고 안간 힘을 쓰는 사람도 아니니, 이런 일들이 나와 전혀 무관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행여나 내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것을 독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 욕심이 자꾸만 내 안에서 어두움을 늘여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본다면, 왕좌에 앉아야만, 푸른 집 안에 살아야만, 금배지를 달아야만 권력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지금 내가 누군가를 지배하고 있다면, 나도 그 사람에게서 권력자로 군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성당에서, 너를 위해 봉사하지 않고, 너 위에 서려고 한다면, 그 욕망 자체가 권력자로서 군림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대다수는 그런 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이 사랑이라고 버젓이 말을 한다. 너라는 존재가 아직도 어리기 때문에, 아직도 배울 것이 많기 때문에, 아직도 세상이라는 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식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랑은 움켜 쥐는 것이 아니다.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군림하려는 순간부터, 군림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너에게서는 눈물이 나온다.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는 사람, 자기 눈에 피눈물 난다는 말은 허튼 소리가 결코 아니다. 하늘의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