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혼인 예식 때에, 신랑과 신부는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이렇게 서약한다. « 나 OOO는 당신을 내 아내로 맞아들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
신의를 지키고, 사랑하며 존경하는 것, 이 세가지는 혼인생활의 근본이다. 이 세가지만 제대로 실천하더라도 혼인생활에 별 탈이 없다는 말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이 세가지를 온전히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녹녹치 않음을 결혼생활을 이미 하고 있는 이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내가 살고 싶은 삶, 그래도 조금은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었는데, 결혼하고 나면,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제대로 살기가 어렵다. 결혼하게 되면, 이러이러하게 살아야지, 저러저러하게 살아야지 하고 온갖 꿈을 꾸지만, 막상 결혼을 하게 되면, 그 꿈들을 하나씩 하나씩 접어야 하거나, 때로는 날개까지도 꺾어야만 할 때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혼인으로 말미암아, 이제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배우자와 함께 삶을 영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생 동안 신의를 지키고, 사랑하고, 존경하겠다고 서약을 하고, 고백을 했지만, 대부분의 새신랑, 새신부는 그 단어들의 의미들을 각자 따로 다르게 이해하며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 ‘다름’이 더 이상 ‘다름’으로 이해되지 아니하고, ‘틀림’으로 이해되면서부터 부부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각자가 꿈꿔왔던 행복한 결혼생활이 전쟁터로 바뀌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때 즈음이 되면, 결혼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마치 똥통에 빠진 부부가 함께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오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백했던 문장을 혼인예식 때의 서약문과 비교해 본다. 베드로는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이 있었다. 자신의 스승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영원한 승리자, 실패도 좌절도 없는 찬란한 영광만이 보장된 메시아로 여겼기에, 이 스승을 졸졸 따라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자리 하나, 커다란 콩고물 하나 떡 하니 떨어질 것으로 여겼던 베드로였다. 그런 베드로에게 있어서 스승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은 산통을 깨는 일이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는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로 본다면, 이 대화의 장면은 분명, 사랑 싸움의 한 장면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맨 처음’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혹은 누구를 위해 서로 만났는지를 상기시킨다. « 우리가 하느님 일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만나 사는 것이지, 사람 일을 하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라고 말이다.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 싸울 때도 있고, 그러다 보면, 둘 다 똥통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있다. 그럴 때에, ‘맨처음’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혹은 누구를 위해 서로 만났는지를 상기하고, ‘맨처음’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그 싸움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부들은 이러한 노력을 일생 동안 한결같이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몇 번 시도하다가 상대방에게서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식의 삶을 살아가거나, 그 삶에도 이력이 나고, 그 삶을 도저히 견디지 못할 때에, ‘이혼’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꺼내게 되는 부부들이 부지기수이다.
베드로를 꾸짖었던 예수는 결코 베드로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에게 참 메시아는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놓는 존재임을 당신의 온 삶을 통해 드러내 보이셨다. 3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말하며, 스승을 배신했던 베드로를 위해서 ‘괜챦다’고 빙긋이 미소지어 보이셨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겨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뵈옵기가 너무나도 부끄러워 고기 잡던 배에서 얼른 뛰어 내려서 물 속으로 자신을 숨기던 베드로를 불러서 함께 아침을 나누고, «베드로,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 »라고 세번이나 물으면서, 그 때마다 « 내 양들을 잘 돌보라 »라는 부탁까지도 했던 예수였다. «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 »라는 물음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 «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에 언제나 충실하셨던 예수였다.
예수는 베드로의 그 고백을 베드로의 사랑 고백으로 여기셨음에 틀림 없다. 나를 사랑하는 저이가 나를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데, 내가 그러한 삶을 살아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 하며, 사랑하는 제자에게 스승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보여주셨다.
오늘 복음은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이들 간의 고백이 얼마나 큰 일을 해낼 수 있는지를 생각케 한다. 그 고백에 충실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요, 사랑의 길이요, 아픔의 길이지만, 또한 동시에 부활의 길임을 넌지시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혼인 예식 중의 부부 간의 고백에 서로가 일생동안 충실하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을 치면, 바로 그 애씀과 몸부림침이 십자가의 길이요, 사랑의 길이요, 아픔의 길이지만, 동시에 부활의 길임을 오늘 복음은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결혼은 사랑하는 배우자에게만 사랑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 생활이 아니다. 결혼을 통해 부부는 배우자가 태어나서 살아온 세상, 배우자와 함께 열매를 맺은 자녀들이 태어나 살아갈 세상에까지도 사랑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결혼은 사랑을 성숙시켜주고, 사람을 성숙시켜 주는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세상 곳곳이 많이 아프다. 불의가 넘쳐나고, 환경 파괴와 생명 죽이기가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가진 자와 없는 자 간의 불평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윗물은 아랫물이 어떤지에 대해서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윗물은 썩을 대로 썩어 있다. 윗물이 무책임하고, 썩어 있으니, 아랫물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정도이다. 한마디로 오늘 복음의 표현처럼, « 사탄아 썩 물러가라 »라고 외치고 싶은 세상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때에 그를 위해 그저 기도만 하지는 않는다.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고, 그에게 약을 먹이고, 그에게 적절한 치료를 받게 한다. 그러면서 그를 위해 기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이 나라 이 땅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한다. ‘알아서 하겠지’하는 생각에 뒷짐지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는 나 역시 세상을 따라서 아프고 병이 날 것이다. 도대체 무얼 해야할까 ? 이 주간동안 주님과 함께, 내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이 물음에 가만히 응답해 보는 한 주간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 분명 참으로 의미있는 한주간이 될 듯하다. 오늘 제 1독서의 마지막 말씀을 되새기면서 의로운 한주간을 보냈으면 한다. «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