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 34,6-7)
복음 안에 넘쳐흐르는 하느님 자비의 세계,
사랑의 세계는 몇 번을 들어도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감동의 세계이다.
하느님의 참모습, 대자대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도록 하자.
"떠날 자유를 주는 아버지만이 돌아올 자유도 준다."는 말은
죄인인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떠날 자유를 주시었기에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아버지께 돌아올 자유도 주시었기에 용기를 내어 회심할 수 있는 것이다.
- 루가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
<작은 아들>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모든 것을 잃었다.
돈도, 친구도, 자신의 신원도, 나아가 인간이란 정체성도, 하지만 잃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아무리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는 것 아버지의 사랑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 순간부터 집 밖에 나와서 아들을 기다리신다.
아버지의 이 사랑만은 작은 아들이 아무리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그에게 이 사랑은 마지막 희망이다.
누군가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후회를 하면서도 계속 같은 식으로 산다면 그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죄인이 자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그 죄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뉘우침은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뉘우침이 행동으로 나올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죄인이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흥분하시고, 기뻐하시고, 당신이 해주고 싶은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다.
그러니 회심의 초점은 우리 죄를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다.
회심의 초점은 간절히 기다리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큰 아들>
큰아들과 같은 상태에 있는 이들이 많다.
"저런 놈이 성당에 다니는 한, 성당이 저런 놈을 환영하는 한, 난 성당에 다닐 수 없어."
하면서 화가 나서 공동체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거절할 때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스스로가 그 사랑을 거부했으니.....
<아버지>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경우처럼 큰아들에게 있어서도 사랑 이외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아버지가 택한 최선의 방법은 대자대비하신 사랑이 큰아들 가슴을 적시게 하는 것뿐이다.
사랑만이 사랑의 응답을 들을 수 있다.
사랑은 인간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하지만 강제는 의무만 낳을 뿐이다.
아버지의 대자대비 하신 사랑의 마음은 작은아들에게만 아니라. 큰아들을 향해서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대다수는 작은 아들이거나 큰아들도 다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집에 돌아오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덥석 안아주며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용서하고, 위로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우리는 대자대비하신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
하느님을 떠나간 죄인이 삶과 반응과 회심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잃어버린 양이나 동전의 비유처럼 하느님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일방적으로 찾아 나섬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죄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께로 일어나 돌아갈 때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짐을 알려준다.
우리 대다수는 작은 아들이거나 큰아들도 다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집에 돌아오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덥석 안아주며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용서하고, 위로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우리는 대자대비하신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
하느님을 떠나간 죄인이 삶과 반응과 회심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잃어버린 양이나 동전의 비유처럼 하느님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일방적으로 찾아 나섬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죄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께로 일어나 돌아갈 때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짐을 알려준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대자대비하신 마음을 느낄 수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예수님 비유 속의 아버지를 닮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우 어린 시절로 돌아가 거기에서부터 치유되는 수밖에 없다.
무조건적인 사랑보다는 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비보다는 벌을 더 많이 받으면서 억압된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이
나중에 하느님 아버지로서 부르려 할 때 얼마나 힘든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럴 땐 끊임없이 기도생활과 영적훈련을 하면서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려 애쓰지만 어린 시절 형성된 부모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하느님께 투사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하느님은 여전히 멀리 계실 뿐이다.
그분은 오늘 우리를 안아주었다가 내일 내치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 아빠,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
"하느님 아빠,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
"하느님 아빠,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
이를 믿는 다면 은총일 것이다.
회심의 초점은 우리 죄를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기다리시는 하느님 아빠 아버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다.
원수에 대한 최고의 보복은 사랑뿐이요, 박해자에 대한 최고의 보복은 기도뿐이다.
하느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과 존중의 사랑으로. 원수와 박해자에게도 자기 탓이 아닌 그만의 고유한 사정이 원인이 있을 수 있다.
무지의 악의 희생자일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사실도 참 많을 수 있다.
무지에 기인한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 오해와 착각의 왜곡된 시선이나 생각으로 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도 참 많을 것이다.
그러니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을 닮아, 끼리끼리 유유상종(類類相從)의 편협한 이기적 사랑을 벗어나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성사(聖事)인 교회에 속한 우리들은 결코 동호회원들이나 친목회원들이 될 수는 없다.
생명 있는 모든 존재가 살 권리가 있는 하느님 사랑의 대상들이요 종파를 초월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한가족임을 깨닫는다면 전쟁의 악은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5. 48)
바로 예수님처럼 이런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은 우리의 선물인생에 부여된 평생숙제일 것이다.
이런 평생숙제를 목전에 둔 우리들 도대체 죄지을 시간이, 세상 헛된 일들에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의 완전함(perfectin)이란 대자대비하신 그분을 닮은 사랑의 너그러움(generosity), 온전함(wholeness)을 뜻한다.
우리 모두가 주님 십자가의 사랑으로 수렴되며 주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의 은총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여정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