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오늘은 성탄 대축일입니다. 오늘밤 우리가 들은 하느님 말씀은 루카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탄생과 목자들이 주님 탄생을 알게된 경위에 대해서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로마 황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예수님 탄생 시기의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첫번째 황제이기도 합니다. 원래 로마는 오늘날의 국회와 비슷한 원로원이 권력을 가진 공화제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 원로원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지중해 주변 지역의 온갖 내란과 전쟁을 평정함으로써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룬 사람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비롯해서 중동 지역 역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파견한 로마 총독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에 반항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에게는 십자가형이라는 처형으로 지중해 세계를 제압했습니다. 로마의 평화라고 하지만, 실상 로마 제국의 눈으로 볼 때 그렇지, 실상은 군사력과 폭력으로 이루어 놓은 강요된 평화였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계획과 뜻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보여줍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서 보자면, 변방 가운데 변방에서, 온갖 힘센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겨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다윗 왕가의 자손이라고는 하지만 아이 낳을 방 하나 구하지 못한 가족들에게 하느님의 계획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새로난 아기는 포대기에 싸여 가축들의 여물통에 눕혀집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고 가장 연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그 아기의 탄생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이들은 밤새 들판에서 양떼를 지켜야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이들 역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천사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을 찾지 않았고, 목자들에게만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알립니다. 천사의 알림과 더불어 목자들은 영광의 빛을 보고, 하늘 군대의 찬양노래를 듣게 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렇게 오늘 복음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중심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가운데 오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가장 낮은 곳에, 가장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풍요로운 삶이 있음을 가르쳐 주시고, 그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경제적 능력이나 군사적 권력에서 이룰 수 있는 로마의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힘으로 얻거나 힘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목자들과 같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이렇듯 가장 낮고 초라한 구유 앞에서 또 가장 가난하고 작고 약한 아기 앞에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더욱 낮아지고 가난해지도록, 그래서 가장 낮고 초라한 곳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오늘 주님의 성탄 대축일을 맞아, 우리의 마음이 목자들의 마음으로 채워지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쁨과 희망이 구유에 잠든 아기의 꿈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더 강하게, 더 채워서, 더 편하게 살고자 했던 내 마음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주시는 더욱 충만하고도 영원한 평화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밤 모든 신자들과 그 가정에 주님께서 주시는 참다운 평화가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