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전주곡)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강생(降生)하셨다.
구체적으로, 그분은 인류를 원죄와 본죄로부터 구원하기위해 오셨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굳게 믿어 온 그리스도의 주된 강생 이유이다.
무엇보다도 원죄는 인류가 그 조상에서부터 죄의 세력 아래 있으며,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죽음, 부활이 아니었다면 결코 인류가 헤어나올 수 없는 보편적인 절망의 상태를 표현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드러내는 구원의 역사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제외한 채, 더 나아가 하느님을 부정한 채 인간적인 계획을 건설하려는데 있다. 성경은 창세 3장에서 첫 인류가 주장한 것이 이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금지된 열매를 따 먹었다. 이 죄의 결과는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그들은 지상 천국으로부터 쫓겨났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에는 고통과 노동, 죽음이 생기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첫 인류가 저지른 첫 번째 죄는 원죄(peccatum originale/페카툼 오리지날레)가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원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첫 번째 신학자였다. 로마서 5,12절에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 조금 전에는 이렇게 말한다,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을 필요로 한다.(로마 3, 23 이하)
원죄에 대한 교리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바오로 사도의 전망에서 성경 계시의 문맥에 따라 정당하게 제시되고 있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죄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죄 교리는 이미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시대부터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의 죄는 오직 그 자신에게만 해를 입혔지 모든 인간에게 그런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펠라기우스가 원죄를 부인하기까지는 그 누구도 원죄를 신학적 체계를 갖고 깊이 있게 설명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이단에 맞서 원죄의 신비를 체계적으로 밝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를 부정하는 데서부터 자신의 주장을 펼친 펠라기우스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
모든 인류가 선조로부터 시작해서 ‘원죄’의 영향아래 있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원죄의 실체를 천명함과 동시에 그 죄로 인해 온 인류에게 치명적인 부정적 결과를 강조 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원죄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세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① 성경의 가르침(구체적으로 창세 3장의 원죄 사화와, 로마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
② ‘유아 세례’라는 전례적 전통(유아 세례)
③ 모든 사람이 자신 안에서 경험하는 악을 향한 근원적인 경향성인
탐욕(concupiscentia/콩쿠피스켄티아)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며, 자신의 선한 의지의 열성만으로 원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될 수 없다면, 그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인류가 깊숙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선조인 아담의 죄에 참여 하고 있으며, 첫 인간의 죄 이후에 태어났거나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죄로 물든 본성을 갖고 태어났다다는 점을 전적으로 확신했다.
더 나아가 그는 후손들에게 원죄가 대물림 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영혼전이설’(靈魂轉移設 : 이 주장에 따르면, 자녀의 영혼은 자손 번식을
통해 부모의 영혼으로부터 유래하며 이때 원죄도 함께 전수 된다.)을 주장했다.
종합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에 대한 가르침을 재확인하면서 펠라기우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즉 자신의 선한 의지와 자유 의지의 열성만으로 이 원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원한다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은 하실 수 있으며 실제로 그분은 그렇게 하길 원하셨고 그렇게 하셨다.
하느님은 당신의 무한한 자비와 더불어 죄로 인해 타락하고 그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해 그들에게 당신의 유일한 아드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비롯해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된 구원은 보편적인 특징을 갖는다.
펠라기우스는 아일랜드 출신의 열심한 수도자였다. 본래 그가 의도했던 것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허용되고,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에 의해 국교로 선포됨으로써 로마 제국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아 완화되어 가던 모습을 보며, 교회를 쇄신하려는 데 있었다.
이런 펠라기우스를 보며 처음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에 대한 존경과 우정을 견지했다.
그러나 구원 역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간파한 아우구스티노는 주저 없이 그에 맞서 싸웠다.
펠라기우스는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도덕적 태만을 걱정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그들의 행위가 개선되기를 원했다.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의 주장을 거부한 이들은 하느님은 인간이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했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죄란 한 인간이 하느님의 법을 저버리고 자발적으로 범한 행위라고 했다.
히포의 주교인 아우구스티노는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했는데,
그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는 의에 도달할 수 없고 온전히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16년 아프리카 주교들의 2개 공의회에서 단죄받았고, 418년 카르타고에서 다시 단죄받은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418년 결국 파문당했으며, 그후 펠라기우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인간 본성의 선함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펠라기우스는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도덕적 태만을 걱정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그들의 행위가 개선되기를 원했다.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거부한 이들은 하느님은 인간이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했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죄란 한 인간이 하느님의 법을 저버리고 자발적으로 범한 행위라고 했다.
펠라기우스의 제자인 켈레스티우스는 원죄에 대한 교회의 교리와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거부했다.
히포의 주교인 아우구스티노는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했는데, 그는 인간이란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는 의에 도달할 수 없고 온전히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논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는 펠라기우스의 견해를 계속 주장했고, 430년 아우구스티노가 죽을 때까지 그와 글로써 논쟁을 벌였다.
율리아누스 자신도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 진영의 사람들과 함께 결국 단죄받았다.
반(半) 펠라기우스주의로 알려진 다른 이단은 남부 갈리아에서 융성하다가 529년 2차 오랑주 공의회에서 결국 단죄받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원죄의 형식적 요소가 본래의 의로움을 상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던 것을 벗어난다고 한다.
반면 원죄의 질료적 요소는 다른 모든 능력의 혼란이다.
이러한 혼란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모든 능력이 영원한 선(善)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무질서하게 일시적인 선(善)들을 원하는데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혼란을
탐욕(concupiscentia/콩쿠피스켄티아)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원죄는 질료적인 면에서 볼 때 탐욕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따르면, 원죄의 결과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순종이 사라졌고,
인간보다 하위의 피조물이 인간에게 순종하던 상태도 사라졌다.
한편 인간 자신 안에서는 어떤 혼란이 일어났는가?
이러한 혼란은 단지 인류의 첫 조상에게만 있는게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후손에게도 전해졌다. 사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초본성적 질서 안에서 하느님을 지복직관할 수 있는 고양(高揚)된 상태를 준비하셨지만, 선조의 죄로 인해 예상치 못한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원죄가 본성과 관련된 죄이지 개인적 죄가 아니라는 점을 본죄와 비교하여
토마스 아퀴나스가 덧붙인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원죄로 인해 부패한 본성이 후손들에게
전해 진다는 의미에서 원죄가 본성과 관련된 죄이지 개인적인 죄는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본래의 의로움의 결핍은 본성에 관한 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시작, 즉 선조의 무질서한 의지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본성에 있어서 의지적인 이 죄는 원조로부터 인성을 나눠 받는 모든 이에게 마치 선조의 신체의 부분에 일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전해진다.
우리는 이를 ‘원죄’라고 부르는데, 이는 후대 사람들의 첫 조상으로부터 근원적으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죄들, 즉 실체적인 죄들은 그 죄를 지은 사람에게 직접 관련되며 이를 ‘본죄’라고 한다.
반면 ‘원죄’는 원조의 죄로 인해 황폐된 본성과 직접 관련된다.
이 원조의 죄는 후손들을 부패시킨다.
제2차 오랑주 교회회의에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약화되어 선언을 하게 된다.
자유 의지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 안에서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혼자서는 영원한 구원을 추구하지도 못하며, 거기에 도달하지도 못한다.
이제 인간에게는 거짓과 죄만 남았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주의를 단죄하면서도, 원죄로 인해 인간 본성이 완전히 부패했다고 본 루터의 입장을 단죄하게 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루터가 제시한 ‘오직 믿음 만으로’(sola fides/솔라 피데스)라는 명제가 당연히 받아들여지게 될 경우,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인하고 더 나아가 인간 본성이 완전히 부패해서 근본적으로는 회복 불가능하다고 하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위험을 피하고자 함이었다라고 선언 한다.
◎ 로마서 7장 14-25절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율법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그런데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이는 율법이 좋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출처 : 서울교리신학원 / 신학편지 리포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