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영성론>
종교 간의 소통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본래 그리스도교 영성에 근원하는 ‘영성’ 개념을 그리스도교에 국한하지 않고 사용하려고 할 때, 무엇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게 되었는가?
영성 개념은 본래 근대에 그리스도교에서 인격적인 신과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초월적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하지만 타종교에서도 고유한 종교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영성 개념을 종교적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영성’(Spirituality)이라는 개념은 본래 그리스도교 영성에 근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간의 소통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 개념은 그리스도교에 국한해서 쓰기 보다는 보편적으로 궁극적 실재와 일체를 이룰 수 있는 고양된 인간 본선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역경』은 변화하는 세계 안에 함께 변화하며 세계를 인식하고 조화해가려는 인간이 변화의 맥락을 인식하고 수행하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변화를 중시하는 이 문헌의 가르침에서 세계는 상관적 관계 안에서 변화하고 존재하는데, 변화가 포착하기 어려운 것인데도 이 변화에 대한 인식이 불가지론적 (不可知論的)이 아닌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은 중국 ‘사유’가 일찍부터 지식을 떠나 수행을 통한 지혜를 추구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불가지론적이지 않다. 인간은 변화 가운데 속해 있는 존재이기에 오히려 그 변화를 체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
『노자』가 “도를 이름 지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엇을 넘어 무엇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노자는 오감에 의존하는 지각의 경계를 넘어서 영적인 지각에 관심을 갖기를 원한다.
영적인 지각은 도를 인식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보아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夷)라고 한다.
‘이’라는 것은 평탄한 것을 의미한다. 지극히 단조롭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의 재계인 심재(心齎)를 말하는 장자에게서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비움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담아낸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 들어차 비좁다.
그러나 마음을 비워 그 자리에 도가 들어차면 어느 것 가림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할 때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크다. 이것이 장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마음의 재계이다.
『장자』가 설명하는 좌망(坐忘)에서는, 마음과 영을 가라앉히는 동적인 비움을 통하여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가?
좌망을 정적인 비움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때의 ‘앉을 좌’는 몸의 자세라기보다는 마음과 영을 가라앉힘이다. 따라서 동적인 비움에 가깝다.
좌망은 나를 잊음으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내고 더 큰 나를 발견하게 한다.
경계가 없어짐은 바로 이 비움의 영적 체험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장자는 이 경지를 진인의 진지에 나타남을 밝혔다.
『주자』는 “도리가 모두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는 마음의 선천적인 도덕적 인식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외적인 도덕 법칙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도덕 법칙 즉, 성(性)에 의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움직임(情)은 성과 일치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공부로서 마음을 극진히 한다는 것은 그 성을 안다는 것이고 성을 안다는 것은 지천(知天)하는 것이 된다.
즉 모든 도리가 내재된 의미에서 마음은 사사로움이 없고 영묘하여 어둡지 않다. 허령불매(虛靈不昧)
주자에게서 마음은 내향적인 도덕적 분별력(性)과 외향적인 충동(情)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마음의 성은 도리의 보편성을 지향하고 정은 개별성을 지향한다.
『공자』의 인(仁)한 마음은 자성(自省)에서 시작된다.
공자가 자성에 대해 말하는 내용과, 그 안에서 수치심의 역할은?
첫째 공자가 자성에 대해 말하는 내용은
“어찌할까? 어찌할까?‘하고 끊임없이 반문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러한 자성은 자신을 스스로 고발하고 모든 대상에 비추어 보는 데서 나타난다.
둘째 수치심의 역할
공자는 심의 성향 가운데 수치(恥)심을 도덕심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언급하였는데, 부끄러움을 예를 통한 도덕적 관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도덕 의식으로 삼았다.
나아가 “어진 사람을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스스로 깊이 반성한다.”(『論語』『里仁』)고 하셨다. 여기서 생각함(思)은 자성이며 자신에 대해서 성실히 생각하는 것이다.
『맹자』는 평단지기(平旦之氣)의 상태에서 외물에 흔들리지 않던 사람이 그 기운을 잃으면 마음을 잃고, 자신의 욕구에 따르게 된다고 말한다. 그 고유한 본성을 보존하기 위한 맹자의 수양론의 첫 단계에서, 마음을 찾고 회복하는 것으로.
평단지기는 새벽의 맑은 기운이며 이 기운을 받은 마음의 기운을 의미하기도 한다.
평단지기의 상태에서 청명한 기운으로 인하여 사람은 외물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밤의 기운이 벗어지면 사람은 자신의 욕구에 따르게 되어 평단지기가 드러난 수가 없다.
이것을 맹자는 잘려나가는 싹에 비유하였다.
맹자는 이것을 마음을 잃는 것(放心)이라 하였다.
그러한 고유한 본성을 보존하고 함양하는 것이 맹자의 수양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마음을 대상화하여 찾는 것이 아니다.
그 잃어버린 마음을 어떤 마음이 도로 찾을 수 있겠는가.
외물에 빠져 있는 마음을 거두는 데서부터 마음을 구하는 것,
구방심(求放心)이 시작된다.
외물을 그 자체대로 보지 못할 때 마음이 외물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외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는 것이다.
되돌아보아 자기에게서 구하는 것이다.
반구저기(反求諸己) 이것이 자기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회복하는 수양에 있어서 맹자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몸을 사랑하는 데부터
시작한다.
다산 정약용은 지천(知天), 곧 상제의 명을 잃지 않고서는 택선(擇善)할 수 없다고 말하며,
지천의 궁극적 의미가 개인의 윤리적 행위로 나아가는 데에 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에 따르면 사람이 인격적인 신을 체험할 수 있는 까닭은 사람의 영명(靈明)을 하늘이 품부해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명은 하늘을 인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영명성의 중요한 인식작용인 지천은 『중용 』에서 말하는 수신의 근본이다.
주자학과의 관계
다산이 제기한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첫째,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보고 있는데 비해,
다산은 자연과 인간 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다산은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요순 3대의 제도에서 그 규범을 찾으려고 했다.
한편 그는 천인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하늘(하느님)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하늘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셋째, 욕망관(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주관적 심성 문제에 치중한다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대별되는 주장이다.
<‘친민’(親民)>
“친민의 영성”은 사랑의 영성으로 조선의 유교적 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 나타난 마음의 상태를 함축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다.
정약용에 따르면 명덕은 ‘효ㆍ제ㆍ자’를 뜻하므로 ‘효ㆍ제ㆍ자’가 밝혀지면 그 결과로 백성들이 서로 불화하지 않고 화목하고 친애하게 된다는 것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해서 정약용은 격물의 格은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이른다는 것인데, 멀리 있으면 잘 알 수 없던 사람의 됨됨이가 가까이 대해 보면 잘 드러난다는 의미의 인격이라 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격’(格)은 가까이 마주 대한다는 뜻을 가진다.
‘물’(物)은 물질세계의 모든 것을 일컬으며 추상적인 것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치지’(致知)는 아는 것의 극치, 즉 대충 아는 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정확하고 자세히 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격물치지는 사물을 놓고 최선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 당시 文을 物 보다는 우위에 두는 전통이 있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조선시대 사회에서
사대부의 대학자가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이 지극히 놀랍기만 하다.
정약용은 심설 논쟁의 폐해로 가득한 조선 현실에서 실천성을 견지한 영명(靈明)으로서의 인간을 자신의 교육론을 통해 그리고자 하였다.
그는 인간이란 상제(하느님)가 품부해 준 영명지심(靈明之心)으로부터 선한 성향을 품부받은 존재로 선한 성향을 따라 선을 실천해야 하는 도덕적 책무가 있는 존재라 설명한다.
이러한 인간은 공부로써 중(中)과 시중(時中)의 마음 상태를 확립할 수 있었는데,
그에게 있어 한 인간이 중과 시중의 마음 상태를 가졌다는 것은 어떠한 사태에서도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선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마음 상태를 확립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정약용은 기존 심학(心學)에서 제기되는 경(敬)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론적 의미를 새로이 제시하며, 한 인간의 영명 실현 가능성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욕심과 악이 분분하게 일어나는 인간의 성향 아래서 모든 인간이 선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의 기반을 확립할 수 있는 길을 공부로 제시하면서, 선을 선택하고 선을 행하는
정은 상제(하느님)가 인간에게 내린 천명을 실현하는, 영명한 성(誠)한 삶의 길임을 밝힌다.
정약용의 교육철학은 도구적 교육관이 만연해 있는 한국교육의 현실에서 주체적으로 삶을 꾸려 나가는 영명한 인간, 윤리적으로 선을 실천하는 영명한 인간에 관한 교육론적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육철학적 함의를 지닌다.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많지만, 당시 철저한 신분제도로 억압 받고 있었던 조선 사회에 서학(천주교)은 새로운 학문으로 다가왔으며, 특히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은 획기적인 교리였다.
이것은 정약용의 사상 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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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망(坐忘) : 정좌하여 현재의 세계를 잊고 잡념을 버려 무아의 경지에 들어감
진인(眞人) : 진리를 깨달은 사람
지천(知天) : 특정한 인간사와 자연사에 관한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지물(地物) : 어떠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지상의 물체
지인(知人) : 인간적 자아의 존재와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허령불매(虛靈不昧) :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신령하여 어둡지 아니하다는 뜻
평단지기(平旦之氣) : 새벽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새벽의 아직 다른 사물과 접촉하기
전의 맑은 정신을 이르는 말.
외물(外物) : 마음에 접촉되는 객관적 세계의 모든 대상
구방심(求放心) :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다.
반구저기(反求諸己) : 되돌아보아 자기에게서 구하는 것.
영명지심(靈明至心) : 상제가 품부해 준 선한 성향을 품부받은 존재로 선한 성향을 따라
선을 실천해야 하는 도덕적 책무가 있는 존재
출처 : 서울교리신학 / 신학편지 리포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