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복음 10,46-52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여 돌아오게 하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남은 자'를 야훼의 가난한 이라는 뜻을 가진 <아나윔>이라 불렀습니다. 가난한 이, 곧 부족을 느끼는 이라야 구원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가난한 이들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한 가난한 이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눈먼 거지' 본인의 이름조차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진지 오래되어 다만 '바르티메오' 곧 티메오의 아들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 사회적 존재가치를 잃어버린 절대적으로 가난한 이였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는 그였지만 그에게는 하느님을 의지하는 마음, 하느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마음이 살아있었고 예수님에 관한 소문들을 들었을 때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이시고 그를 구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요.
예수님을 찾아나설 수 없는 그에게 마침내 기회는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존재가치가 없는 그의 부르짖음은 소위 본다는 이들, 안다는 이들에게는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해서 그 소리를 막으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그는 정확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어쩌면 사는 게 아니라 죽은 존재로 취급당한 그였지만 사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그 많은 이들보다도 더 살아있는 존재였습니다.
요한복음9장에는 다른 눈먼 이(태생소경)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안식일에 고쳐주셨다고 시비를 걸던 유다 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9,39)
누가 보는 사람이며 누가 눈먼 사람일까요?
우리가 볼 수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참으로 보아야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드디어 그는 다시 보게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주의해 봅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가 눈을 뜰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진 믿음 덕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눈먼 거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내면의 눈을 뜨고 살았기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습니다.
그 믿음의 비결은 듣고 마음에 새기는 데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눈뜸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게 합니다. 예수님만이 삶의 의미, 행복이라는 것을 보게 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