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청년의 질문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갈망에 말을 건넵니다. 우리는 먹고 자고 일하고, 또 아웅다웅 다투면서도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적 삶을 넘어서는 질문을 가집니다. 우리 삶의 참다운 가치와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인생의 참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궁극적인 신비는 무엇인가? 이러한 우리 삶의 궁극적인 질문을 대변하여 오늘 복음의 청년이 주님께 질문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계명과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이미 어릴 적부터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왔다고 대답합니다. 계명과 율법을 잘 지키며 사는 삶은 그것 자체로 중요하고 훌륭한 삶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함정도 있고 위험도 있습니다. 계명과 율법은 인간 삶의 외적인 행동과 행위에 집중됩니다. 더구나 그것들은 많은 경우 부정적으로 표현됩니다. 살인해서는 안되고, 간음해서도 안되며, 도둑질해서도 안됩니다. 모두가 금지와 규제입니다. 그러나 살인하지 않았다고, 간음하지 않았다고 모두가 선하고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요청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요청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청년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재산을 팔아서 자선하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요청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부터 참으로 자유로워지라는 요청입니다. 재산과 재물은 단순히 물질적인 의미를 넘어섭니다. 사람은 재산과 재물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자신보다 재물과 재산을 더 앞세우고 더 사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재산에 얽매이고 집착하며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자유롭지 않으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갈망에 제대로 응답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놀라며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제자들의 이 말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부족하고, 인생의 노력으로 이룬 재산도 포기해야 한다면, 과연 누가 구원받을 것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다”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채우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통해 이루고 쌓아올린 것으로 우리의 깊은 갈망을 채우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가치도, 우리 삶의 참다운 행복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것 모두가 실상 하느님이 우리에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구하고자하는 ‘영원한 생명’도, 제자들이 놀라 질문하던 ‘구원’도, 인간이 쌓아올리고 이루어 놓은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탱하고 있고, 우리의 인생이 하느님의 자비로 채워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의 삶을 감싸 안아주시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