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23주일 강론)

 

에파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은 무엇일까요? 바로 귀와 입이지요.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소통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소통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부류가 농아인들입니다. 차라리 앞을 보지 못하지만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시각 장애인들이 훨씬 낫지요. 농아인들은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말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손으로 하는 수어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수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끼리의 소통을 말하는 것이고, 일반인들과의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주 사람을 의심하게 되고, 오해와 불신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귀먹고 말 더듬는 장애인의 치유 기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복음이 농아인의 치유 기적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육신의 장애가 기적적으로 사라졌다고 해서 인간성 회복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일까요? 혹 우리에게 이웃과 하느님과 소통하지 못하게 만드는 영적인 장애는 없는가요? 비록 우리는 귀가 있지만 제대로 듣고 있고, 혀가 있지만 제대로 말하고 있는가요?

 

이번 주 저는 시노드를 위한 한국 교회 본당 사제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전국 16개 교구 대표 신부님들이 총 43명이 모였고, 23일 동안 시노달리타스를 위한 대화를 첫날 3시간 반, 둘째 날 6시간 반, 셋째 날 2시간 총 12시간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태어나서 한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장시간 경청하고 대화를 나눈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듣는 것도 힘들고, 말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의 대화 기법으로 나누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서로가 하나 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각 교구와 지역적 특징이 다르고, 본당 구성원의 규모와 수준의 차이도 있고, 특수 사목지의 상황이 다르지만, 그래서 사목의 방법론도 다를 수 밖에 없지만, 성령 안에서 시노달리타스가 지향하는 정신과 가치, 그리고 방향성은 일치했으며, 무엇보다 같은 사제로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같았기에 진정한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노달리타스는 말이 생소하고 평신도들에게 난해한 개념이지요. ‘시노드에서 나온 말인데. 그 말뜻은 쉰(함께)+호도(), 함께 길을 걷는 것을 말합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각각 직분과 은사는 다르지만 같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함께 걷는 교회의 생활양식이며 교회의 현존 방식을 시노달리타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노달리타스의 원리는 상호 경청, 소통, 존중, 성령 안에서의 대화, 공동체적 식별, 공동책임과 참여, 그리고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사명입니다.

 

(인천 교구 어떤 신부님의 시노달리타스 풀이 이야기)

 

, 어떻게 이해가 되십니까? 어려운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이해하기 쉬운 비유이지요. 손을 잡고 함께 걷는 것.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공감해 주는 것이 시노달리타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걷는 것안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본당 신부가 경청과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평신도들이 자기 유리한 대로 복음적이지 않은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또 본당 신부와 평신도들이 공동 합의했다고 해도 그것이 복음에 합당하며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기도 안에서 식별하지 않으면 그것도 시노달리타스가 아닌 것이지요. 천천히 가도 소외되는 사람 없이 함께 가야하고, 빨리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름길로 가긴 보다는 돌아가더라도 성령 안에서 정도(正道)를 걷는 것이 시노드입니다.

 

그러나 시노드를 방해하는 교회 안의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결정하든, 어떤 일을 하든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지 않고 성령과의 대화 없이 그저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세속주의

충분한 의견 수렴 과정 없이 상명하달식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몇몇의 영향력 있는 신자들 중심으로 일을 처리하는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

의사소통 과정이 공동체적인 합의와 공감대 조성 없이 외적인 결과와 실적에만 급급한 나머지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능률주의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또 소수 약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 없이 다수결이나 몇몇 협의체 대표들의 합의로 해결하려는 집단주의.(더러 본인이 공동체를 대변한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다수의 보편적인 의견이 아니라 사견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과연 제대로 듣고 있으며, 제대로 말하고 있는가?’를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잘 들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를 열고 잘 들어야 하고, 동시에 성령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기도 안에서 잘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로 식별할 수 있고, 올바로 대화할 수 있으며, 올바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본당 신부는 여러분들과 함께 걷고 싶습니다. 저와 함께해 주실 거죠? 우리들의 동행 길에 주님께서도 동반해 주실 겁니다. ‘세상 끝날 때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잠시 성령께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분의 말씀을 경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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