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16주일 강론)

 

목자 없는 양

 

다산 정약용 요한의 목민심서의 서문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오늘날의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들은 여위고 병들어 줄지어 굶어 죽은 시체가 구덩이를 메우지만 다스린다는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목민심서는 목민관이 갖춰야 할 정신과 태도, 자질과 품성, 그리고 애민정신에 바탕한 구체적인 관리 방법에 대한 공직 수행 교과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들에게는 철저한 도덕성과 봉사정신, 그리고 탁월한 행정 능력이 요구됩니다.

 

한편 구약의 예언자들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돌보는 군주와 관리들을 목자에 비유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례미야 예언자는 그 목자들을 향하여 맹비난을 서슴지 않습니다.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예레 23,1-2) 양 떼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양 떼를 치는 목자들은 백성을 다스리는 위정자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목자들이 양들 위에 군림하면서 수탈과 학정을 일삼는 역사는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착한 목자의 등장을 고대해 왔습니다. 이제 예언자들의 착한 목자에 대한 기대는 신약의 예수님께 와서 성취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백성들이 기다려 왔던 착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신 당신의 사역 가운데에서도 군중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외딴곳에서 휴식하시려는 것을 포기하십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배를 타고 건너가려는 주님의 일행보다 앞서 군중들은 육로로 달려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호수 둘레가 52km 정도 된다고 하니 일부 거리만 달려도 곧 허기지고 신발도 다 떨어지고 얼굴은 땀과 먼지로 거지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치 목자 없는 양들 같이 여기시고 가슴이 아프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기댈 곳 없이 버려진 고아들과 같은 처지의 가련한 백성들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방치, 위험, 고달픔, 굶주림, 목마름, 길 잃음, 두려움 같은 단어들을 연상시킵니다. 대체 그들이 무엇을 찾아 주님을 따라온 것일까요? 하루하루 사는 게 고달픈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위로해줄 메시아로 보였던 것이지요.

 

본당 신부도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세상과 교회에 파견된 목자입니다. 신자들의 영신 사정에 관심이 없는 사제는 착한 목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양과 목자 사이에는 끈끈한 유대와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익명 속에 살아가는 신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내 양이 신앙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무엇이 힘든지, 또 무엇이 간절한지를 알아야 사목에 반영할 게 아닙니까? 신자들의 처지를 모르는데 무엇을 가지고 기도하겠습니까? 마치 월드 미스가 왕관을 쓰고 홀을 들고 인터뷰에서 저는 앞으로 평화의 사도로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이바지하겠습니다.’라고 추상적으로 수상 소감을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신자들을 알아야 제대로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사목을 하지 않겠습니까?

 

가끔 꿈에서 신자들을 만납니다. 어르신들도, 봉사자들도, 어린이들도... 평소 관심이 꿈에 반영된다고 봐야겠지요. 그러나 악몽을 꿀 때도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중재해도 말을 듣지 않고 서로 싸우고 성당을 떠나는 모습이 꿈에 등장할 때면 깨고 나서도 한참을 뜬 눈으로 괴로워합니다. 제가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들고 너무 예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목자들에는 미사 참례수와 본당 행사 같은 외적인 성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영적 성장과 교우들 간의 화합과 일치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와 기적 이행은 민초들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측은지심이 무엇입니까? 남의 슬픔과 아픔을 똑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의 목민관인 공직자들은 물론 사제와 같은 종교인들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덕목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모든 신자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가져야 할 덕목이기도 합니다. 측은지심 안에는 그 어떠한 비교와 판단이 없습니다. 그저 가엾은 마음으로 모두를 돌보는 것입니다.

 

사제는 미사를 마칠 때 이렇게 외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이 파견 선언은 미사 안에서 받은 은총을 간직하고 세상에 나가 열매 맺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미사 전례를 통하여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웠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의 제자답게 일상 안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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