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요일 성 이레네오 주교학자 순교자 기념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예수님 시대 당시 나병이 걸린 사람은 동네 밖에서 살아야 했다. 고을 안으로 들어왔다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거나, 몽둥이로 맞아 죽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에 걸린 사람은 많은 사람들 앞에까지 나왔고, 예수님께 다가가기까지 했다.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매일 썩어 문드러져 가는 자신의 몸뚱이도 환멸이었겠지만, 그런 자신을 개 돼지보다 못한 짐승 아니 괴물로 취급하던 세상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그 삶의 자리에서, 그 나병환자는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찾아 갔다. 병자들을 고쳐 주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손을 덥석 잡아주며 다시 살라고 일으켜 세워주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죽으려고 간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갔다. 하루라도, 아니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사람으로 살다 가고 싶어서, 죽을 각오를 한 것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마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외쳤다. «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
오늘 복음을 신앙인의 삶의 자세라는 시각으로 바라 본다면, 나병환자의 말과 행동들은 분명, 믿는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나병 환자와 예수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을 다시 읽어 보면, 오늘 복음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사실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청난 사실, 그것은 바로 나병환자도, 예수님도 둘 다 모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다가왔던 나병환자에게 예수님도 목숨으로 응답하셨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나병환자가 목숨을 걸었고, 그 나병환자의 진정성에 하느님의 아들도 똑같이 목숨을 거는 진정성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 소통이 있었고, 거기에 구원이 있었다. 이 불통의 시대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또 하나, 목숨을 걸고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드러내야 할 교회의, 성사(聖事)로서의 사명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 억울한 이들이 하소연할 길이 없을 때,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댔을 때,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그렇게 목숨을 걸고 그들을 맞이하였는가? 오늘 복음은 나에게 이렇게 다가온다.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