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윤리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라, ‘인간이 윤리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전제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선하게 살기를 원하신다고 보기 때문이다.
약간 말을 바꾸면, ’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모상으로 창조하셨는데, 참으로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닮아 창조된 인간이 선하게 살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뜻은 인간 편에서 보면, 우리가 선하게 살아야 하는 ‘당위(當爲)’가 된다.
이 말을 조금 더 풀어보면, ‘인간은 선을 행해야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근본적인 윤리 도덕적인 가르침에 관한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진리의 광채』는 이 답이 있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진리의 광채를 받은 인간 영혼의 깊은 곳이라고 가르친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한다는’는 자명한 원칙에 따라 우리가 행위와 관련된 목적을 설정하고 실천이성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며, 그것을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실행에 옮길 것인지를 판단할 때, 심사숙고와 양심과 의지는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는가?
우리가 우리 행위와 관련된 어떤 목적을 설정하면,
우리 실천 이성은 심사숙고(deliberatio)라는 과정을 거쳐 그 목적에 부합하는 정당한 수단을 찾는다.
그리고 양심(conseien-tia)은 실천이성이 제시하는 제안을 개별 행동에 적용하고,
우리 의지(voluntas)는 실천이성이 제안한 바에 부합하는
행위를 선택하거나(원하거나), 이전에 지니고 있던 목적을 포기하는 결정을 한다.
의지는 이성을 따라야 한다.
만약 의지가 실천이성에 의해서 제시되지 않은 바를 실천에 옮기고자 한다면, 그 의지는 죄를 짓게 된다. 또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실천이성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양심은 “우리의 인식(cognitio) 또는 지식(학문, scientia)을 우리 행위에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윤리도덕과 관련된 문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개연적이다. 여러 개연적인 견해들이 있을 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개연적(probabile)”이라는 용어는 “모든 사람이나 다수의 혹은 자격이 있는 권위의 판단(iudicium)으로부터 선하다고 인정받은 것” 그리고 “거의 모든 경우에 그렇게 행동할 의무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알퐁소 성인은 규범을 무시하거나 이완 주의로 빠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규범의 자구적이고 외적인 준수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중용을 요구한다.
윤리 도덕 신학이 사목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알퐁소 성인은 규범은 우리의 양심(良心)을 양심(養心)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가르친다.
계명과 교회의 많은 권위 있는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토대로 우리 스스로 복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키우고, 그 안에서 내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보아 하느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계명만 지키면 된다는 핑계 뒤에 숨어서 고통받는 이웃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이런저런 좋은 구실을 만들어서 계명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양극단을 배제하는 것이다.
양심은 그곳으로부터 법이 나오는,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법의 소리를 듣는 지성소이다.
시노달리타스를 살아가는 교회 안에서 이 양심은 어떤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함께 하느님 말씀을 듣고 나누며 공동으로 식별하는 양심에서 나온다.
선한 일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필요하다면(마태 19,16 참조),
우리는 우리 전제의 전제가 되는 또 다른 전제를 발견한다.
바로 ‘선한 일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필요하다.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은 ’선한 일‘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세례의 은총으로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그 은총의 힘으로 ’선한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또 던지게 된다. 질문이 질문에 꼬리를 물게 되다 보니, 우리가 모든 질문에 다 답을 할 수는 없겠다.
이 문제는, ’하느님의 결코 취소될 수 없는 은총이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늘 선으로 이끄는데, 인간은 이 은총으로 힘을 얻고, 이 은총에 자신의 자유의지로 협력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키워 나가고 또 그 은총으로 선을 행할 힘을 얻는다.
이로써 인간은 선한 행위를 통해 자신이 받은 은총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고,
선한 행위의 실천을 통해서 그 인간이 받은 은총은 더 커지고 자라난다.
그리고 이렇게 그 선한 행위는 구원에 보탬이 된다,‘라는 내용으로 갈음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의 질서(ordo am0ris)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사랑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사랑하고, 사물을 사물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인간을 하느님 위에 놓고, 재물을 내 이웃보다 더 사랑한다.
이 경우에는 이 목적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가 깨어진 것이라 하겠다.
출처 : 서울교리신학원 “신학편지” 리포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