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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20:43

요한 카시아누스의 8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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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카시아누스의 8죄종

<요한 카시아누스의 8죄종>

1). 탐식(gastrimargia/가스트리마르기아)

2). 음욕(fornicatio/포르니카티오)

3). 탐욕(philargyria/필라르귀리아)

4). 분노(Ira/이라)

5). 슬픔(tristitia/트리스티티아)

6). 나태(Acedia/아케디아)

7). 허영(헛된 영광, cenodoxia/케노독시아)

8). 교만(superbia /수페르비아)

보통 7대 죄악, 7죄악 등으로 불리나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공식 명칭은 칠죄종(七罪宗, 라틴어: septem peccata capitales, 7가지 근원적인 죄)으로, 한국 천주교에서도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칠죄종(가톨릭 굿뉴스, 가톨릭대사전)

이 개념의 창시자는 6세기의 교황 그레고리오 1세와 요한 카시아누스(Ioannes Cassianus)로 알려져 있다.

단 그 이전에 4세기에 이미 그와 유사한 개념인 8가지 악한 사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수도자 에바그리우스(Evagrius)가 정의했다고 하며,

이것이 그 제자 요한 카시우누스에 의해 번역되어 전파되고 그레고리오 1세에 의해 교만과 허영, 슬픔과 나태가 합쳐져 6가지가 되고 빈자리에 질투가 들어가 7가지의 죄악이 되었다고 한다. 혹은 슬픔이 질투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기독교 수도사 전통에서 수도사들이 다스려야 할 마음의 나쁜 상태는 8가지 악으로 정리되는데,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허성준(가브리엘)신부님의 책에서 8가지 죄악을 오늘날에 맞게 9가지 마음 상태로(질투가 추가됨) 설명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나태(Acedia); 깨어있음의 중요성

2. 탐욕(Avarita); 물질적, 영적인 탐심

3. 탐식(Gula); 음식의 탐욕

4. 간음(Furnicatio); 간음과 정신적 성적탐닉

5. 교만(Superbia) : 자기애

6. 헛된 영광(Vana gloria) : 인정욕구

7. 질투(Invidia) : 자기애

8. 분노(Ira) : 공격성

9. 슬픔(Tristitia) : 균형 상실

(출처: 수도전통에 따른 렉시오디비나2, 허성준, 분도출판사)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이 7죄종을 말했던 것에 비해 에바그리우스는 8죄종을 말한다.

본디 에바그리우스는 이 8죄종을 일반적인 모든 사람보다는 수도자들에 대해 연관 시켰다.

8가지 죄악은 수도자로서 살아가는 과정 중에 꼭 쳐부수어야 할 대적 상대였다.

요한 카시아누스가 탐식과의 싸움을 영적 여정의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카시아누스가 수도생활의 기준으로 삼았던 이집트의 은수자들은 사막에서 홀로 생활하면서

자신의 음식을 준비하여 하루 두 끼를 먹거나 그중 한 끼를 단식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다양한 음식을 마련하는 게 쉽지도 않고, 양을 많이 먹는 게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먹는 것과 관련된 이 싸움을 카시아누스는 앞으로의 영적 여정에 있어 출발점이 되는 싸움이라 보았다.

우리의 관심사를 영적인 것으로 바꾸어가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진정으로 영적으로 되어가는 것도 이 죄를 극복하는 데에 크게 영향을 준다.

우리의 허약한 마음이 여러 영상으로 포위되지 않고 자꾸만 더 관상을 향해 나아갈 때,

이런 해로운 상상들을 근원적으로 몰아내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단순히 내 힘이 아니며하느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니 이 싸움에서 자신이 아닌 주님을 믿고 그분 도우심을 의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카시아누스는 겉으로는 화를 내지 않으면서도 계속 화가 나 있는 이들과 벌컥 화내는 사람들을 각각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는 화 안 난 척하면서 계속 화나 있는, 오래 끄는 분노는 사실 화내는 본인이 무자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화 안 났다고 말하면서도 계속 짜증을 내고 무례하게 군다.

자기 안에서 그 분노가 다 소화 될 때까지 긴 시간 우울한 상태에 머무른다.

벌컥 화내는 사람들의 분노는, 주로 자신의 고통의 관점에서만 분노가 움직이는 사람들이라고 카시아누스는 지적한다. 그런 이에게는 조언이 들어갈 수 없고, 그런 내면에 성령이 머물지도 못한다. 분노가 다 억눌린 뒤에야 비로소 그 안에서 성령의 광채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허영의 핵심은 결국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위해 일하지 않고,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허영과 맞서는 성경 말씀을 되뇌며 살도록 카시아누스는 시편 53,6 등 여러 성경 말씀을 제시한다. 또 자만심이나 헛된 영광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지시를 수행하지 않고, 첫 마음을 살려 일관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주문한다. 결국 이 허영에 있어서 답이 되는 것은 겸손과 순종이다.

8죄종의 다른 것들은 덕의 성장과 더불어 위축된다면, 교만은 덕 자체를 공격한다.

역병과도 같은 교만은 정의로움, 거룩함 등의 덕을 공격하여 그것들이 무익한 것이 되게 만든다.

그런 덕을 이루었으니 나는 얼마나 대단한가!”하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다.

8죄종의 다른 악습들이 자신에 반대되는 덕을 무너뜨린다 해도 사람에게는 나머지 다른 덕이 남아 있지만, 교만에 떨어지고 나면 덕의 근간 자체가 훼손되어 모든 덕이 한꺼번에 무용지물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영적 투쟁의 산물로서의 덕은 사라지고, 반대로 없애야 할 것들을 제거할 수 없게 된다.

탐욕을(단순히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난의 덕을 통해 벗어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의 광기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가난의 덕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기에 수도자는 가난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없는 중에라도 기회가 닿으면 좋은 것을 얻기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가난의 덕을 선택하지 않은이라면 실제 가진 것이 없더라도 탐욕의 죄에 빠질 수 있다.

가지지 못한 이의 탐욕은 가난의 이점을 기쁘게 생각하지 않기에, 악한 마음에다 소유욕까지 함께 가진 셈이라고 카시아누스는 말한다. 결국 탐욕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을 가지려는 광기이므로이런 광기는 만족을 모르며, 단지 가난에 의해서만 멈춰질 수 있다.

감정적인 슬픔과는 다른 8죄종의 하나인 슬픔은 정적인 슬픔과는 다소 다르다.

실망하고 초조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에 가까운 것 같다.

이 슬픔의 죄는 우리가 우리 안에 공격성과 악습의 씨앗을 묻었기에 시작된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화나는 일이나 본인이 뭔가 불이익을 받은 일,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일, 짜증이나

절망, 특히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한 경우 등이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 결과 자신의 처지를 비참하게 여기고, 뭔가 이러저러한 것을 원하는 마음이나 분노가 함께 일어난 뒤 슬픔의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 남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내 마음에 쌓아놓다가 이것이 슬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경의 카인이나 유다 이스카리옷같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슬픔에 떨어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딱히 뾰족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슬픔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슬픔에 떨어진 이들은 공동체 생활에서 문제가 나타난다. 다른 이들을 공손히 대하지 못하고, 남들이 가볍게 하는 말도 지나치지 못하여 일일이 반응하고, 괜한 말을 한다고 창피를 주거나 자애롭지 않게 응대한다.

그러다 보니 동료들과 평화롭게 지내기 힘들어진다. 기도에서도 간절한 기도가 잘 안 되고 수도자 가 일상적으로 하는 거룩한 독서 안에서도 마땅한 도움을 얻지 못한다.

기도와 일이라는 수도자의 두 가지 주요 과업에서 모두 참을성이 없는 태도로 임하게 된다.

슬픔이 진행되면서, 윗사람의 권고를 무시하고, 꾸준하게 뭔가를 이루어내는 삶의 방식조차 포기하게 된다. 나중에는 일종의 죽음에 다다를만한 절망을 겪게 되고, 그 와중에 지성이 무력해지고 압도당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가끔은 슬픔이 슬픈 마음이나 느낌으로 오기도 하고, ‘슬프다라는 원통한 일을 겪거나 불행한 일을 겪게 될 때,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로 표현하기도 했다.

슬픔은 외로움으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타지에 살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슬픔이 찾아왔고타지에서의 친인척이, 형제자매가 없는 공동체 생활도 어려워서 슬픔도 많이 찾아왔다.

슬픔은 기쁨보다 훨씬 보편적인 감정이었나 보다. 슬픔을 겪은 사람으로서 타인의 슬픔에 반응할 줄 알게 되었고, 공감할 줄 알며, 위로할 줄 알게 되었다.

위로받은 슬픔은 인생의 실패나 상처를 털고 다시 일어설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찾기 어려운 것 같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 바로 슬픔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장기간 슬픈 경우 우울증이 되지만, 그렇다고 아예 슬픔을 배제 해 버리면 오히려 그 상처가 곪아 조울증이나 증오나 분노 같은 감정으로 바뀌어, 현실적이지 못한 인간이 되어버린다고 하니.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기에 슬픔 또한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 : 서울교리신학원 신학편지리포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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