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음 >
-교부들의 가르침-
1). 암브로시우스는 『죽음의 유익』에서, 죽음이 하나의 징검다리라고 말한다. 그가 죽음에서 오는 축복을 생각하고 기꺼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이란 만인이 통과해야할 하나의 징검다리이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영속적인 ‘건너감’이어야 한다. 부패에서 반부패로, 필멸에서 불멸로, 혼돈에서 평온으로 ‘건너감’에 따라오는 축복을 생각하고 기꺼워해야 한다.
2).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상해』에서,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죽음을
사람들은 특히 두려워한다. 하느님에게서 영혼이 분리되는 죽음이 진짜
죽음이건만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3). 바르사누피우스와 요한의 『평신도와 주교들에게 보낸 질문과 답변 』에서,
스스로 죽음을 상기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한다.
어떤 이가 자신이 죽을 존재임을 스스로 상기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자발적인 이득이다. 스스로 죽음을 상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신이 죽을 존재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영원히 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4).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라자로에 관한 강해』에서, 바오로 사도가 우리의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데,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우리를 위해 겪으신 그분의 수난을 믿게 하기 위하여 죽음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우리에 관해서는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잠’이라는 낱말을 사용한 것이다.
5). 아우구스티누스는(부활시기) 『설교』에서, 우리 안에서 죽음이 죽으리라는
것을 설명한다.
죽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보십시오.
거기엔 죽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존재하긴 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죽었습니다.
오, ‘생명’이여, 죽음의 ‘죽음’이여!
그러니 용기를 가지십시오. 우리 안에서도 죽음이 죽을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분께 일어난 일이 그분의 지체들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 안에서도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 종말에, 죽은 이들의 부활 때입니다.
6). 암브로시아스테르는 『바오로의 열 세 서간 주해』에서, 바오로가 몸이 죽을 운명이라고 한다.
바오로는 몸이 죽을 운명이라고 한 것은 그 몸이 분해되기 때문이 아니라
지옥의 고통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보내지는 사람은 죽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죄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7). 키프리아누스는 『죽음』에서 죽음을 열망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죽으면, 죽음에 의해 불사로 넘어갑니다. 우리가 이승에서 떠나지 않는 한 영원한 생명이 올 수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통과의 과정이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여행은 영원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더 나은 것으로 서둘러 가고자 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으로 바뀌고 새로워져 더욱 빨리 하는 영광의 존귀함에 닿고자 열망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어좌로, 하늘나라의 영광으로 올라가도록 허락된 사람은 울거나 한탄해서는 안 되며, 주님의 약속과 진리에 대한 믿음에 따라 이승을 떠남과 그리로 가는 통과 과정을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8). 암브로시우스는 죽음의 세 종류와 세 번째 죽음이 둘 사이에 위치 한다고 한다.
죽음의 세 종류
1). 죄로 인한 죽음이다. 죽음에 대하여 “죄지은 자만 죽는다.”
(에제 18,4)고 쓰여 있다.
2). 신비적인 것으로, 사람이 죄와 관련해서는 죽고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것(로마6,11) 이런 죽음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다’(로마 6,3-4)고
말한다.
3). 우리의 육체가 그 기능을 다해 수명을 채우는 죽음이다. 그러니까 한 가지 죽음, 곧 우리가 죄 때문에 죽는 죽음은 악한 것이지만, 죽은 이가 죄에 대하여 의로움을 인정받는 다른 죽음은 선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4). 세 번째 죽음은, 이 둘 사이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둘 사이에 위치한다고 하는 이유는, 이 죽음이 의인들에게는 좋은 일인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가져다주는데도 그것을 기뻐하는 이는 드물기 때문이다.
좋은 죽음을 준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웰 다잉(weii - dying)" (존엄한 죽음의 의미와 가치)"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일반인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며 육체를 중심으로 의료 현장에서
심정지나 뇌사로 죽음을 판정하고 영혼의 존재와 성장을 부정하지만, 죽음을 다루는 생사학(生死學)에서는 육체를 중심으로 죽음을 이해하지 않고 영혼의 성장의 마지막 단계로 끝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옮아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절망 두려움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육체적 차원의 죽음은 존재하지만 영혼 차원의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죽음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인데, 의학의 발전과 함께 만성 질환 상태로 죽음의 과정이 길어지는 것이 현재의 추세로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면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 한다.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삶이 문제인 것 같다.
사실 죽음은 우리 모두의 일이고 바로 나의 일이며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 공부임에 틀림없다.
현대 한국 사회는 죽음의 장소가 가정에서 병원으로 변했다고 한다.
사망자의 76%가 병원 중환자실에서 임종을 맞고 있고, 가족의 보살핌이 아닌 고독한 죽음이며 의료시스템 속에서 외롭고 긴 임종시간을 겪고 있다고 한다. 즉 우리의 죽음은 정서적 죽음이 아닌 과학적 죽음으로 고독사와 자살이
중대한 사회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를 해결하기 위하여 문명을 만들었지만 문명이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을 담아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죽음에는, 반드시 죽고, 혼자서 죽고,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즉 인간은 죽음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인류 공통의 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 준비 교육을 통하여, 죽음과 친숙해짐으로 공포심에서 멀어질 수 있고, 끝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의 변화라는 것을 이해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희망으로 죽음의 공포를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삶을 재인식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기 위하여 죽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죽음을 이해한 후에는 이타심이 증가했고, 그리고 살아온 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죽기 전에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며, 감사하고 만족하며, 나누는 삶, 봉사하는 삶, 현재의 삶과 남은 인생을 잘 살기 위하여 죽음을 알아야가야겠다.
좋은 죽음이란 가능한 준비된 죽음으로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남기고 증상 조절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하며 의식이 있을 때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일 것이다.
출처 : 서울교리신학원 "신학편지" 리포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