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13주일 강론)
참된 기적
요즘 뜨는 트로트 중에 99881234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뜻은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하루, 이틀, 삼일 짧게 앓다가 깔끔하게 죽는 것입니다. 의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기대 수명은 길어집니다. 요즘 100세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명은 길어졌지만 과연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생물학적으로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가치로 인생을 가꾸어가고 결실을 맺을 것인가가 더 중요하겠지요.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지혜 4, 8-9) 아무튼 장수도 좋지만, 영적으로 하느님을 깨닫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이 더 훌륭합니다.
오늘 복음은 건강과 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건강과 생명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먼저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에피소드가 액자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12년 동안 하혈하는 여자를 치유하는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딸을 소생시킨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둘 다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요즘이야 여성이 차별받는 세상이 아니지요. 그러나 예수님 시대 여성은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여성들의 딱한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으로 다가서십니다. 둘째, 둘 다 죽음에 처해 있었습니다. 먼저 하혈하는 여자는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철저하게 격리당하고 저주받아야 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하혈하는 여자와 접촉해서는 안 됩니다. 부정 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혈하는 여자는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몸도 힘들지만 주변의 차가운 시선과 외면이 더 슬프게 했습니다. 한편 야이로의 딸은 너무나 어린 나이에 죽어버렸습니다. 실제로 요절한 소녀도 안 되었지만 자식을 먼저 앞세운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딸의 죽음은 곧 부모의 죽음입니다. 셋째, 두 여성은 12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혈하는 여자는 12년 동안 앓았고, 야이로의 딸은 12년을 살다 죽었습니다. 계산해 보면 그 여인이 하혈하기 시작한 시점이 야이로의 딸이 태어난 시점과 거의 같습니다. 한쪽은 인생의 불행과 사회적 죽음이 시작된 시점이고, 또 다른 한쪽은 한 아이의 축복과 생명이 시작된 시점입니다. 그러나 12년이 지난 지금도 하혈하는 여인은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야이로의 딸은 이미 죽어서 되살아날 가망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둘 다 살리십니다.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충만수이고 완전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치유와 소생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하혈하는 여인을 낫게 해 주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기적은 하느님께서 일으키시지만, 그 출발점은 인간의 믿음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시신 기적은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참된 기적은 반드시 인간의 믿음을 성장시키고 영적인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불가사의한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이 나의 인간성과 영성을 어떻게 바꿔놓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이 대목에서 조선시대 정해박해를 배경으로 한 김탁환 작가의 소설 『사랑과 혁명』에 나오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전라도 곡성의 어떤 마을에 장구라는 장애인이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을 한쪽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어 거동도 힘들고 말도 어눌하게 하는 동네 거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우연한 기회에 교우촌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귀도라는 세례명을 얻습니다. 그 이후 그에게 기적이 일어나는데 사지가 다 멀쩡해진 것입니다. 그는 공소회장을 따라다니며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외인들에게 간증했고, 교우촌에서 점차 자신의 위상과 입지를 키워 나갑니다. 그러나 정상인이 된 장귀도는 욕심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공소회장을 몰아내고 자신이 공소회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포수꾼인 외인 친구를 부추겨서 옹기마을을 범을 비롯한 산 짐승들이 습격하게 만들고, 큰 바위를 굴려 옹기 가마를 박살 내고는 그 탓을 모두 지금의 회장에게 돌리려 합니다. 그러다가 장귀도는 벌을 받습니다.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다른 편의 팔과 다리가 휘어지기 시작했고, 풍 걸린 사람 마냥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책하며 결국 교우촌을 떠나게 되고, 이전의 동네 거지로 돌아갑니다. 그의 교만과 탐욕이 기적을 거두어 가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장귀도는 나중에 회심하여 박해받는 교우들을 위해 대신 순교하려고 하고, 그들을 도와주며 교우촌에 남아 순교자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정상인이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장애인 장귀도는 지금의 자신과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기적입니까? 몸이 나은 게 기적입니까? 회심하고 다시 교우촌으로 돌아온 것이 기적입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치유와 소생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은 몸이 나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성장한 것이 기적이며, 또 기적은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기적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도 그 기적을 체험하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