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일(나해, 2024년 6월 23일)강론
오늘의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풍랑을 잠재우신 기적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의 4장은 1절부터 오늘의 40절까지 배에 타신 채 씨뿌리는 비유, 등불의 비유,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오늘 풍랑을 잠재우신 기적을 행하십니다. 오늘의 이야기 안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람을 꾸짖고 호수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강론은 세 가지 점에서 드러나는 제제들, 곧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든 비유들과 기적에는 항상 그 중심에 우리의 굳건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잘못과 관계없이 억울하게 시련을 당할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기 잘못으로 불행하게 된 때라도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필이면 왜 저입니까, 하필이면 왜 우리 가정입니까? 라고 원망하며 갑작스레 찾아온 불행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심지어는 십자가를 내동댕이 치거나 마침내 냉담하기도 합니다. 그런 때에 주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또 하나의 묵상 거리는 우리가 일상에서 오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현세를 도피하거나 주어진 현실을 용납하기를 거부하고 회피하려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심으로써 이를 잊으려 하거나 또 다른 형태의 모습을 통해서 모면해 보려 합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또 하나의 묵상 거리는 우리가 일상에서 오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현세를 도피하거나 주어진 현실을 용납하기를 거부하고 회피하려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심으로써 이를 잊으려 하거나 또 다른 형태의 모습을 통해서 모면해 보려 합니다.
이러한 현세에 대한 도피나 회피의 모습 가운데는 ‘두려움’이란 요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무언가 두려워하면서 살아갑니다. 두려워하니까 사람이라고 합니다. 두려움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처음으로 느낀 감정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끄럽고 두려워 숨게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걱정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풍랑 속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두려움은 주님께서 같은 배를 타고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나와, 우리 가정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일도 그분의 도우심에 힘입어 도전할 수 있으며 또 해결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배 위에서 풍랑을 맞은 제자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였기에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세 번째 묵상 거리는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심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께는 바람과 바다도 복종시키고 더러운 악령도 굴복시키는 내용을 성서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내가 세상의 주인인 양 행동합니다. 그래서 내가 필요할 때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호주머니에서 무슨 액세서리를 꺼내듯이 하느님을 호출하고, 무슨 일이 잘되고 나면 모두가 내가 잘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우심이나 은총에 대한 감사는 찾아볼 수 없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이상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한 때 회사에서 잘 살아남기 위한 학문으로 비비올로지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한 상관이나 우두머리에게 아부하거나 잘 보임으로써 출세하는 것도 하나의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인간에게 아부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아부하는 우리 자신이 되었으면 합니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이제부터는 그분을 나의 친구요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이 믿음을 배우는 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은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고통의 질곡(桎梏) 속에 거센 풍랑을 만나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배워갑니다. 마치 여인이 아이를 낳아 기를 때 비로소 엄마가 되는 법을 배워가듯이, 우리 역시 실제 삶의 체험을 통해 신앙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배움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고통과 함께 찾아오는 불신의 병은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의심과 불안의 파도가 몰아치는 방황의 끝자락에서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음성을 듣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무언가를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면 이제 스스로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하며 내 안에서 주무시고 계신 주님을 깨워 무엇이든 청합시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