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 강론

by 김해_홍보분과베네딕도 posted May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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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2일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 강론
천주교 부산교구 김해성당 이균태 안드레아


        들판에 나가 두 팔을 벌려본 사람은 안다. 자기 몸을 감싸고 있는 빈 공간들이 모두가 다 하늘이요, 자기 몸의 한 부분인 발이 닿아 있는 거기가 바로 땅임을 안다. 예수께서 하늘로 돌아가셔서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이제 예수께서는 성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몸 곁에 계시는 분, 당신의 이름인 임마누엘에 온전히 충실하신 분으로 현존하신다는 말이다. 사실, 예수 승천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고, 그분의 승천을 믿고, 기념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고 예수님의 삶을 따라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또 하나의 예수가 된다는 말과 같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길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하셨던 일들을 이어서 가난하고, 고통 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현을 빌면, « 가난한 교회 »가 되는 것이다. « 가난한 교회 »와 «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 », 분명 다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는 교회에 가난한 사람 돕기라는 명분과 재산 증식이라는 실리를 동시에 안겨 줄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면 돈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종교는 가난한 사람에게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가난한 사람 돕자는 데에는 어떤 정치적인 색깔 논쟁도, 윤리적인 선악문제도 별로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프리카 난민이나,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기들 영상을 보여주면서 후원금 요청을 하는 광고는 왜 그들이 난민이 되어야 했는지, 왜 아기들이 굶어 죽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구조적인 모순과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논리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는 가난을 낳는 구조나 세력에 대한 비판을 삼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한 채로 남게 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는 « 가난한 교회 »는 가난한 이들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그들이 주인공이 되며,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한 교회다.

그저 마음의 평안을 바라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힘듦과 삶의 무게를 주님께 모두 다 내던져 버리듯이 송두리째 내어 맡기고, « 알아서 하시오 »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그저 헌금 열심히 내고, 교무금 열심히 내고, 미사 시간 내내 장엄한 얼굴을 한 채, 한 순간의 방심이나, 분심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 아니다. 또, 자신의 삶이 왜 이 모양 이 꼴밖에 안되느냐고 푸념과 원망을 그분께 쏟아 내거나, 혹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면서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떼를 쓰듯, 그분에게 억지를 부리며 기도하기만 하고, 손도 까딱 안 하는 것도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것을 현세의 부귀영화나 현세의 복을 누리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고 하셨지만, 그 제자들의 삶은 박해와 순교로 점철된 삶이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을 믿으면, 부귀영화나 복을 누리는 식의 구원을 받기 보다는 고생 바가지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럼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 한방에 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진리와 사랑의 힘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 사랑과 진리의 생명은 죽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 가난한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며, 교회에서 VIP 대우를 받는다는 것,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 죽음으로 점철되는 문화 속에서도 생명을 부르짖고, 잊어 버리고 가슴에 묻어 버리자는 달콤한 유혹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것, 이러한 일들이 바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증거하는 길이다. 이 길은 분명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바로 이 길이 구원에로 이르는 길이다.


        사랑하는 김해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순간순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또 실제로 잠시 쉬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사랑의 길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바로 구원이다. 구원은 어떤 지점에 다다랐을 때에 누리는 영광이 아니다. 마치 등산을 할 때에, 정상에 이르렀을 때에 느끼는 감흥이나, 가슴 뭉클함만이 구원이 아니라, 정상에 오르기까지 겪었던 모든 순간, 땀이 비 오듯이 온몸을 다 적시고, 때로는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고, 그래서 무릎이 깨어져 피가 흐르더라도, 때로는 포기하고 돌아가 버릴까 하는 유혹을 겪으면서도, 그래도 끝까지 한번 가보자고 다시금 어금니를 깨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는 그 순간 순간들,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정상을 향해 걸어가는 그 순간 순간들이 바로 구원이다.

오늘도 그 구원의 길 위에서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그 순간순간들의 주인공들인 우리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 우리들과 함께 웃고, 우리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우리들과 함께 통곡하며, 우리들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고 계시며, 우리들과 함께 이 미사를 봉헌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