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성령 강림 대축일 강론)

 

오소서, 성령이여!

 

오늘은 부활시기의 마지막 날인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셔서 우리에게 협조자 성령을 보내주셨고, 사도들은 오순절 때 성령을 받고 모두 주님 안에서 일치하여 세상 밖으로 복음을 전하러 나갑니다. 따라서 성령 강림 대축일은 바로 교회 탄생 기념일인 것입니다.

 

가끔 전포성당에는 외국인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할 때가 있습니다. 국적을 물어보면 미국, 프랑스, 독일, 폴란드, 크로아티아, 필리핀, 베트남 등 다양합니다. 그런데 전 세계 가톨릭은 전례가 동일하기 때문에 모국어가 아니더라도 독서와 강론 말고는 다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미사 마치고 나갈 때 인사하면 모두 하나 같이 저를 ‘Father’ 이라고 부르며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가톨릭은 말 그대로 보편된 교회이며, 전례, 교리, 성경, 교계 제도, 교회법 등 모든 것이 로마 바티칸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가톨릭 신자들은 같은 성령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됩니다. 이제 몇 년이 지나면 한국에서 세계 청년 대회를 하게 될 텐데, 세계 잼버리 대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 조직과 규모에 있어 독보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부산교구도 그 대회를 목표로 3년 간 청소년과 청년의 해를 보내게 됩니다. 국가, 언어, 인종, 문화, 정치체제는 다르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그날 모두 주님 안에서 일치와 화합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각기 다른 모국어를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지역의 신자들이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자기네 언어로 알아들었다고 전합니다.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지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통역사도 필요 없이 폰에 앱을 깔고 번역기 돌리면 다 해결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는 기적의 경이로움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교회 일치입니다. 이 메시지를 더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바벨탑 사건은 창세기의 저자가 과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지구라트를 보면서 창작해 낸 이야기이지요. 지구라트는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서 수메르 문명이 낳은 당시 최첨단 건축 기술로 만들어진 신전이었습니다. 지구라트는 기술력도 기술력이지만 많은 인원과 재정이 동원되어야 하는 거대한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구라트가 모티브가 된 바벨탑 이야기에서 그 높고 웅장한 건물이 하늘을 치솟아 올라가다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공사가 중단되지요. 한계를 모르고 신의 영역까지 넘본 인간의 교만을 보신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의 말을 다 섞어 버리신 것이 그 원인입니다. 서로 언어가 달라진 사람들은 소통이 불가능해지자 더 이상 바벨탑을 쌓을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보다 높아지려는 인간의 교만은 결국 분열을 가져 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때는 이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 뜻을 외면한 교만의 바벨탑은 무너졌지만,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교회는 다시 우뚝 세워졌고,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흩어졌지만, 성령을 받는 신자들은 모두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단지 외국어를 기적적으로 알아들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 강림 때, 즉 교회 창립일 때 모두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 코린토 1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일치를 두고 이렇게 설파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2,4; 12,12)

 

한편 오늘 복음은 성령 강림 사건이 오순절이 아니라 주간 첫날 저녁, 즉 주일에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이뤄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신학적 특징은 부활, 승천, 성령강림 사건을 시간차를 두지 않고 한 번에 이어진 사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아무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당신의 숨과 함께 내어주시면서 당신의 평화와 용서도 더불어 주십니다. 참된 교회란 공동체 구성원이 성령 안에 머물면서 주님의 평화를 누리고, 하느님께 용서받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관계가 될 때 건설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 탄생을 축하하면서 성령 하느님께 청원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개인이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슬기, 통달, 의견, 굳셈, 지식, 효경, 두려움)를 받아 자신의 성화를 이루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맺어 교회 공동선에 이바지하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물지 못하면 미사는 허례허식일 뿐이고, 봉사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며, 공동체는 세속의 사교 집단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늘 부속가인 성령송가에 나오듯 성령 하느님은 위로자이시며 우리 마음과 영원한 행복의 빛이십니다. 부디 그분께 허물들은 씻어주고 메마른 땅 물주시고 병든 것은 고쳐 달라고, 또 굳은 마음 풀어주고 차디찬 맘 데우시고 빗나간 길 바루게 해달라고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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