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R. E. Brown,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Double Day, 1997, pp. 333-382.
염철호 역.
요한 복음은 독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문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먼저, 이 문체적 특징을 살펴본 뒤, ‘메시지에 대한 개괄적 분석’이라는 항목에서 네 번째 복음서를 현재의 형태에 따라 그 사고 패턴을 추적해 가며 전체적으로 읽어내릴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복음서의 기원에 대해 이론화하는 작업을 할 것이다. 특별히 이 이론화 작업은 다음과 같은 주제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항목들로 이루어 질 것이다, 순수한 복음서로서의 요한복음, 공관복음과의 비교, 통일성과 응집성, 사랑받는 제자의 저자로서의 역할, 요한계 사상에 미친 영향들, 요한 공동체의 역사, 생각해 보아야 할 논쟁점, 참고문헌.
문체상의 특징들
요한복음은 우리가 아래의 논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문체와 신학이 밀접하게 엮여 있는 복음서다.
(1) 시문 형식
많은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일부 단락에서 형식적인 시문 양식이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어떨 때는 서언과 아마도 요한복음 17장에서 볼 수 있듯이 절(strophe)로 그 흔적을 나타내기도 한 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겨나는 문제는 훨씬 더 광범위하다. 요한복음의 담화들에서 독보적으로 나타나는 장엄한 양식들에 관한 것인데, 어떤 이들은 이것들을 반(半)-시문적(semipoetic)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요한 복음의 이런 시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은 구약에서 볼 수 있는 행들 간의 병행대구(parallelism)나 압운(rhyme) 방식이 아니라, 운율(rhythm), 곧 대략 비슷한 길이의 절들이 하나의 절을 이루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담화들이 시적 형식으로 인쇄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예수가 공관복음 보다 요한복음에서 더 장엄하게 이야기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와 관련해서 구약을 바탕으로 한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시적인데(하느님은 예언자들, 혹은 인격화된 하느님의 지혜를 통하여 말한다), 이것은 좀 더 산문적인 형태를 띄는 인간의 대화와의 차이를 표시해 준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왔다. 이 때문에 시적인 표현은 그의 말이 더 장엄하고 신성하다는 점을 드러내 주기에 적합하다.
(2) 오해
예수는 위로부터 왔으며, 무엇이 “참” 혹은 “실재”(즉, 천상적 실재)인지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말씀이 육이 된 예수는 자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지상의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었다. 이와 같이 일상적이지 않은 주제를 다루기 위해 예수는 종종 자신에 대해 기술하거나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비유적 언어나 은유들을 사용한다. 계속되는 대화에서 질문자는 비유 혹은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구적인 의미만을 취한다. 이로 인해 예수는 자신의 사상을 더욱 철저히 설명하면서 자신의 교의를 펼치게 된다. 이런 오해는 요한의 육화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의도적인 문학 테크닉이었다(요한 2,19-21; 3,3-4; 4,10-11; 6,26-27; 8,33-35; 11,13-15를 보라).
(3) 이중적 의미
이중적 의미는 예수가 말하는 대사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데, 가끔 오해라는 방식으로, 또 가끔은 계시의 다양한 면을 단순히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① 예수가 제공하는 한 단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 의미들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간혹 대화 상대방은 어떤 한 가지를 취하지만, 예수는 다른 의미를 의도하는 경우가 있다(3,3.8의 여러 가지 용어들〈아래 각주 21]참조). 3,14; 8,28; 12,34의 “들리다”(십자가에 못 박힘과 하느님께로 돌아감), 4,10의 “생수”(흐르는 물과 생명을 주는 물), 11,50-52의 “위하여 죽다”(위하여 혹은 대신에). ② 제 4 복음서에서 저자는 종종 독자들이 동일한 이야기 혹은 동일한 은유에서 의미가 여러 층위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기를 바란다. 우리가 여러 시대층과 관련되어 있는 복음서의 저작 환경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본다면, 이는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수의 공생활이라는 역사적 상황에 적합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는 이차적인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2,19-22에서 성전이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구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언급하는 것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생명의 빵 담화는 6,35-51a에서 하느님의 계시와 지혜를, 6,51b-58에서는 성찬례를 언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비유적 설명에서도 3가지 서로 다른 의미가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1,29,36: 묵시적 양,파스카 양, 양 처럼 도축당하러 갔던 수난받는 종). ③ 중복된 연설들. 가끔 예수의 연설은 사실상 앞서 전해진 연설과 동일한 내용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어떤 경우는 절 하나 하나 까지 일치할 때도 있다. ‘요한의 통일성과 응집성’ 항목에서 한 가지 가능한 해결책을 제안한다. 곧 편집자(복음서 저자가 기본적인 작업을 마무리한 후 복음서에 2차적 작업을 한 편집자)가 전승 안에서 복음사가가 포함시켰던 자료와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다른 버전의 담화 자료를 발견하고서는 그 자료들이 버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적절한 자리에 첨가시켰다는 것이다(3,31-35과 3,7-18; 5,26-30과 5,19-25; 10,9과 10,7-8; 10,14과 10,11; 16,4b-33과 14장을 비교해 보라). 가끔 중복되는 자료에서 다른 어조가 느껴지기도 한다.
(4) 반어법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에 대해 경멸하고, 비꼬우며, 의심을 하고, 혹은 적어도 그들이 원하는 바에 합당하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때, 이중적 의미와 오해가 특별히 결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들은 반어법에 의하여 종종 참이되기도 하고, 또 화자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3,2; 4,12; 6,42; 7,35; 9,40-41; 11,50).
(5) 포함구조와 이행부
복음서의 세심한 구조는 몇 가지 기교들을 드러난다. 포함구조(inclusion)란 요한이 어떤 한 단락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특정한 요소와 동일한 요소를 단락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하거나 암시하는 기교를 말한다. 이것은 처음과 끝을 함께 묶어 놓음으로써 그 단락을 포장으로 싸는 방법이다. 대 포함구조는 1,1과 20,28; 1,28과 10,40이며, 보다 작은 포섭구조는 1,19과 1,28; 2,11과 4,54; 9,2-3과 9,41; 11,4과 11,40절이다. 복음서의 한 하위 단락에서 다음 단락으로 항목에서 다른 세부항목으로 이행하는 방식으로 복음 사가는 “개폐” (swing) 혹은 “경첩” (hinge) 모티브 혹은 단락(이미 지나간 것에 대하여 결론 내리며 앞으로 나올 것을 소개하는 방법)을 잘 사용한다. 예를 들어, 가나 기적 이야기는 1,50에 나오는 약속이 이루어짐을 보여주면서, 1장에서의 제자들의 부르심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 기적 이야기는 2,1-4,54라는 이어지는 하위 단락을 열어주는데, 이렇게 되면 이 하위단락은 첫 번째 가나의 기적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가나 기적 이야기로 끝이 난다. 두 번째 가나 기적 이야기는 이 하위 단락을 결론짖지만 생명을 주는 예수의 능력을 (4,50) 생명에 대한 예수의 권위가 도전을 받게 될 이어지는 다음 단락(5,1-10,42)을 준비해 준다.
(6) 삽입구 혹은 각주
요한은 삽입구를 자주 집어넣는다. 이는 셈어로된 용어나 이름(예. 1,41.42; 9,7; 11,16의 “메시아,” “케파,” “실로암,” “토마스”)을 설명해주거나, 이야기에서 이야기 전개를 위해 필요한 배경이나 지리적 특징을 알려주며(예. 2,9; 3,24; 4,8; 6,71; 9,14.22-23; 11,5, 13), 심지어 신학적 관점들을 제공하기도 한다(예, 2,21-22; 7,39; 11,51-52; 12,16.33 처럼 후대의 입장에서 해당 구절을 좀 더 명확하게 해 주거나, 6,6.64처럼 예수의 신성을 옹오하는 설명). 이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처음 한 가지 문맥(팔레스타인 혹은 유다)에서 전달되던 전승이 이제 다른 문맥(디아스포라 혹은 이방인)에서 선포되고 있다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인 듯 하다.
기본 정보 요약
저술연대: 80-110. 주 저자가 복음서를 작성한 뒤, 그 복음서가 또 다른 이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여기는 이들은 복음서의 몸통은 90년대에, 편집자의 첨가는 요한 3서와 거의 동일한 시기인 100-110년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긴다. 전통적인(2세기) 저자: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 내용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저자: 자신이 예수가 사랑하던 제자의 전통에 속한 이라고 여기는 이. 만약 편집자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동일한 전통에 속할 것이다. 대개 요한계 저술 제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저술장소: 전통적으로 에페소 지역이라고 이야기되는데, 이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시리아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통일성: 어떤 사람들은 여러 자료들을 엮은 것이라고 생각한다(“표징” 모음집, 담화 모음집, 수난 사화). 또 다른 이들은 몇 번의 편집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든, 복음서의 몸통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완성되었고, 편집자가 나중에 첨가 부분(21장, 1,1-18도 가능)을 첨가 했다고 보는데 찬성한다. 그러나 복음서의 어떤 사본도 이 “첨가” 부분 없이 보존되어 있는 것은 없다. 완전성: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7,53-8,11)는 삽입된 것으로 많은 사본들에 생략되어 있다. 아래의 논쟁점 1을 보라.
구조: 1,1-18: 프롤로그: 육화된 말씀의 이력 소개와 요약.
1,19-12,50: 1부: 토마스:, 말씀이 세상과 자신에게 속한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지만, 그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 예수가 다양한 칭호를 가지고 자기 제자에게 계시하는 첫 몇일 (1,19-2,11) 2. 가나에서의 첫 번째 부터 두 번째 기적까지; 대체와 예수에 대한 반응의 테마들(2-4장): 물을 포도주로 바꿈, 성전 정화사건, 니코데모,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료하심. 3. 구약의 축제들과 그것들을 대체함; 생명과 빛의 테마(5-10장), 안식일 - 새로운 모세인 예수가 휴식을 취하라는 안식일 명령을 대체한다(5,1-47), 파스카 - 생명의 빵(지혜와 성찬례를 계시함)이 만나를 대체한다(6,1-71) 초막절 - 생수의 근원과 세상의 빛이 물과 빛의 의식을 대신한다(7,1-10,21). 성전봉헌축제 - 예수는 성전 제단에서 축성된다(10,22-42). 4. 라자로를 살리심과 그 결과(11-12장): 라자로가 부활했다. 산헤드린이 예수를 사형 판결을 내렸다.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장례를 준비하여 예수에게 기름을 부음. 예루살렘으로 들어감. 공생활의 종결과 이방인들이 도착함으로써 때가 왔음을 알림.
13,1-20,31: 2부, 영광의 책: 그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말씀은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 아버지에게 되돌아감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인다. 그는 온전히 영광스럽게 된 뒤, 생명의 영을 보내 준다.
1. 최후의 만찬과 예수의 마지막 담화(13-17장), (a) 최후의 만찬(13장), 식사, 발을 씻어줌. 유다의 배반,담화에 대한 소개(사랑의 계명,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 (b) 예수의 마지막 담화(14-17장): 1부(14장): 예수의 떠남, 떠나심, 하느님의 내재, 보호자. 2부(15-16장): 포도나무와 가지, 세상의 증오, 보호자의 증언, 1부의 주제를 반복함. 3부(17장), “사제적” 기도 2. 예수의 수난과 죽음(18-19장): 체포, 한나스 앞에서 심문 받음과 베드로의 부인,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 십자가 처형, 죽음, 매장. 3. 부활(20,1-29), 예루살렘에서의 네 개 장면(무덤에서 두 장면. 방 안에서 두 장면), 복음서의 결론(20,30-31), 기록 목적에 대한 진술.
21,1-25, 에필로그, 부활한 예수가 갈릴레아에 나타남, 두 번째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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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메시지에 대한 개괄적 분석
앞서 살펴본 기본 정보 요약 부분을 세밀하고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이 장의 처음에 나오는 상세한 개요 부분을 조심스럽게 보면 도움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5)에서 언급한 바대로 이 복음서는 복음사가가 선택한 주제들을 설명하기 위해 주의깊게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1) 프롤로그(1,1-18)
복음서의 서문 역할을 하는 프롤로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견해를 담고 있는 찬송가다. 신적인 존재(하느님의 말씀[1,1.14]), 그는 또한 빛이요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다[1,14.18])가 세상에 들어와 육이 된다. 비록 자신의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지만, 그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완전함에 참여하도록 한다. 이것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애정어린 선물인 율법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보여주는 선물이다. 말씀이 세상으로 내려온다는 것과 결국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에 대한 이런 시적 기술의 배경에는 지혜를 인격화하는 구약 성경이 있다(특히 집회 24장과 지혜 9장). 지혜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율법이 모세에게 계시될 때 인간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 활동이 예수의 초기 활동과 관련된다는 전승에 부합하여, 프롤로그에서 두 번 언급되고 있다. 즉, 빛이 세상에 오기 전과 관련된 대목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1,6-8), 또 말씀이 육이 된 이후의 예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1,15). 이 증언은 뒤이어 나올 1부에서 계속 논의될 것이다.
(2) 1부: 표징의 책(1,19-12,50)
표징의 책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자신을 믿도록 이끄는 동시에 “유다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로 하여금 적대감을 갖도록 부추기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부분(12,39-40)에서 복음서는 하느님이 그들이 보지 못하도록 그들을 소경되게 하였으며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했다는 뜻으로 이사 6,10을 인용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책”은 프롤로그에 나온 주제를 설명하는 것이다(요한 1,11). “그분께서 자기 땡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① 예수가 다양한 칭호로 자기 제자들에게 계시하는 첫 몇일(1,19-2,11)
요한은 하루 하루를 구분하는 방식으로(1,29, 35, 43, 2,1)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점차적으로 알아가도록 만들어 준다. 첫 날에(1,19-28)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설명한다. 요한은 찬양받기를 거절하며 앞으로 오실 분에 대해 예언하는데, 자신은 그에 비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이라고 말한다. 다음 날(1,29-34) 세례자 요한은 예수의 역할을 설명한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1,6)답게 세례자 요한은 예수가 하느님의 어린 양이며, 이전에 존재하는 이였고, 또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이(혹은 아들, 논쟁이 되는 1,34의 독법)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 다음날(1,35-42) 안드레아와 세례자 요한의 또 다른 제자가 예수를 따른다(복음서의 두 번째 부분에 의해 예수가 사랑하던 제자로 여겨지는 사람?). 안드레아는 예수를 선생과 메시아라고 부른다. 그리고 시몬(안드레아의 형제)을 예수에게로 데려 온다. 예수는 시몬을 “케파”(즉, 바위=베드로, 참조. 마르 3,16; 마태 16,18)라고 부른다. 그 다음날(요한 1,43-51) 그는(안드레아, 베드로, 혹은 예수님?) 필립보를 만난다. 필립보는 그 다음에 나다나엘을 만난다. 그리고 예수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자, 하느님의 아들 및 이스라엘의 왕으로 계속 칭해진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이 휠씬 더 큰일을 볼 것이라고 약속하며, 자신이 바로 천사들이 그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훨씬 더 큰 일”은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으로써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된 세 번째 날(3,1-11)에 가나에서 시작되는 듯 하다.
몇 가지 요한의 신학적 강조점이 이 첫 부분에 나타난다. 법률적인 분위기가 이 이야기를 감돌고 있다. 예를 들면 세례자 요한은 “유다인들”에게 심문을 받는다. 그는 증언을 할 뿐, 부인하지 않는다 - 이것은 요한 전승의 일부가 변론 문맥을,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에 관해 심문을 받았던 회당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표시다. 그리스도론과 관련해서 요한이 이 첫 몇일 사이에 다른 복음서에서는 여기 저기에 산재되어 있으며 거의 공생활 마지막 부분에 와서야 선포되는 전통적인 칭호들로 예수를 고백하는 것은 결코 우연적인 것일 수 없다마태 16,16을 보라). 이것은 복음서 저자가 마치 다른 복음서에 잘 알려져 있던 그리스도론적 전승을 기초적인 것으로 묘사하면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끝단계에 해당되는 거에서 자기 복음을 시작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복음서에서 는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오직 마지막 시간에 가서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이미 하늘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그의 활동 가운데 그것을 보게 된다. 또한 이 하위 단락은 제자됨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는 1,38에서 먼저 질문을 시작한다. “무엇을 찾느냐?” 그리고 1,39에서 “와서 보아라.”고 말한다. 처음 예수를 따르던 이들은 그들이 예수와 함께 머물 때 비로소 믿는 이가 된다. 이어서 첫 제자들은 날마다 예수에게 주어지는 “보다 고양된” 여러 칭호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와서 보는’ 행위를 통해 깊어진 그리스도론적 인식을 지속적인 방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려고 나간다.
② 가나에서의 첫 번째 기적부터 두 번째 기적까지(2-4장)
가나 장면은 “예수의 첫 표징”(2,11)이다. 그래서 개폐되는 문과 같이(앞서 (5)의 문체상의 특징), 이 첫 단락은 앞선 계시 단락을 닫아주면서, 4,54에서 마무리되는 이어져 나오는 큰 하위 단락을 시작한다. 4,54에서 우리는 가나에서 행해진 왕실 관리의 아들 치유 사건이 예수가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서” 일으킨 두 번째 표징이라는 말을 전해 듣는다. 대체라는 주제는 이렇게 세 장에 걸쳐 기록된 예수의 행동과 말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요한이 표징이라고 부르는 첫 가나 기적에서(2,1-11), 예수는 유다 정결법에 규정된 물을(돌항아리에 120겔론 이상의 물을 집어넣음) 포도주로 변화시켜주는데, 과방장이 마지막까지 어떻게 이토록 좋은 포도주를 남겨놓았냐며 의아해할 정도로 좋은 포도주였다. 이것은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가지고 온 지혜와 계시를 나타내는 것이며(잠언 9,4-5; 집회 24,20[21]), 메시아의 시대에 포도주가 풍성해 지리라는 구약의 약속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아모 9,13-14; 창세 49,10-11). 이것과 엮여 있는 모티브는 예수의 어머니다. 그녀는 새로운 가정을 꾸민 이들을 위해 가족들이 건내는 형태의 요구(‘포도주가 없구나’)를 예수에게 건내었지만, 자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을 존중하는 어머니의 변함없는 모습(“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때문에, 예수는 원래 그녀가 청했던 요구를 들어준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가나에서의 표징에서도, 예수는 왕실 관리의 청을 한 번 거절했다가, 왕실 관리가 변함없이 간청하자, 그의 요청을 들어주게 된다(요한 4,47-50; 마르 7,26-29도 참조). 예수의 어머니는 십자가 밑에 다시 등장한다(요한 19,25-27). 이 장면에서 그녀는 사랑받는 제자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제자의 신분 속으로 온전하게 들어가게 된다. 한편, 이행 구절(2,12)에서, 예수의 어머니와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를 따라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갔다고 전하지만,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공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더 이상 그와 함께 하지 않는다.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이어지는 하위 단락(2,13-22)은 성전에 대해 예수가 취한 태도를 다룬다. 공관복음의 두 장면에서 병행을 찾을 수 있다: 성전 정화 사건(마르 11,15-19.27-28과 병행구절들). 공관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가 사형에 처해지게 되는데,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산헤드린에서 벌어진 재판에서 증인들은 예수가 성전을 허물겠다고 말했다고 거짓 증언까지 한다(마르 14,58; 마태 26,61; 사도 6,14 참조).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면들이 모두 한 단락에서 다루어지며, 예수 활동 초기에 일어난 일로 복음서 앞 부분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성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진술도 예수의 입에서 흘러나온다(하지만, “내가 허물 것이다”가 아니라, “너희가 허물어라”로 표현된다). 여기서 대체되는 것은 또 다른 성전이 아니라, 다시금 세워지게 될 같은 그 성전이다. 어느 전승이 더 역사적인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알 수 없기 때문에 잠시 제쳐 두고, 여기서는 요한이 강조하고자 하는 두 가지 신학적 강조점 만을 주목해 보자. 요한은 복음서 시작부터 “유다인들”의 적대감을 보여줌으로써, 예수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의 백성들이 철저하게 융화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요한 1,11을 보라). 또한 요한의 해석에서, 성전은 “유다인들”에 의해 “파괴되지만’ 예수에 의해 다시 일으켜 세워질 예수의 몸이다. 따라서 시장으로 변질되어 버린 예루살렘 성전은, 참된 거룩한 장소로서의 예수의 몸으로 대체된다. 2,23-25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가 일으키는 표징들 때문에 예수를 믿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표징의 기적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어서 진정 그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이행적 관찰은 이런 식의 믿음을 가진 이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에게 다가오는 다음 하위 단락을 열어준다.
니코데모 장면(3,1-21)은 요한의 중요한 담화들 가운데 가장 처음 나오는 담화다. 산헤드린 의원인 이 바리사이는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그가 아직은 빛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 그를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으로 인정한다. 니코데모는 이 말을 통해 예수가 “하느님에 의해 세움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이지만, 예수는 실제 하느님으로부터 왔다. 이처럼 니코데모는 합당치 못한 믿음의 대변인이다. 이 사실은 예수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begotten), 곧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설명할 때 분명해진다. 요한의 예수는 하느님에 의해 태어나는 이만이(“위로부터”) 얻게 되는 바로 그 하느님의 생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영을 받을 때 일어난다. 니코데모는 이것을 유다인 어머니에게서 자연 출생함으로써, 구약이 하느님의 자녀로 여기는 백성(탈출 4,22; 신명 32,6; 호세 11,1), 곧 선택 받은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혈통은 요한 3,6에서 거부된다. 왜냐하면 육이 낳거나 출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육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의 예수는 자연적 부모로부터 얻게 되는 특권적 지위를 흔들어 놓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요소를 근본적으로 대체한다. 전형적인 요한의 반어법은 3,9-11에서 볼 수 있다. 곧, 예수에게 와서 “우리는 안다”고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니코데모에게 예수는 믿는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보충해 준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것에 대해 예수가 보증하기 위해 제시하는 근거는 바로 예수 자신이 위로부터 왔다는 사실이다. 이제 니코데모는 자신이 왔던 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대화는 독백이 된다(니코데모는 7,50-52에 가서야 주저하면서 예수의 숨겨진 제자로 다시 등장하고 마지막 19,39-42에 가서는 사람들 앞에 공적으로 등장한다). 3,15-21에서 예수는 처음으로 기본적인 요한의 구원적 육화 신학을 선언한다. 바로 자신은 이 세상에 온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 그분의 생명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을 믿는 모든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또 그렇게 이미 심판된다는 것이다.
1,15.19-34에서 다루어졌던 예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라는 테마는 3,22-30에서 다시금 다루어 지는데, 예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이 마지막 증언(3.22-30)은 예수가 세례를 주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3,5의 “물과 성령”으로라는 세례에 관한 언급을 보강하는데 도움이 된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반대하자, 세례자 요한은 다시 한 번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과 자신이 준비해 왔던 그 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 여기서 사용한 이미지는 신랑의 가장 좋은 친구의 이미지다. 신랑의 친구는 신부의 집(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지키면서, 신랑(예수)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신부 집으로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자 기다린다.
3,31-36의 수수께끼 담화 양식은 요한적인 예수의 이야기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3,7.11-13.15-18에서 말한 것들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편집자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던 다른 형태의 자료들을 첨가해 복음서 저자의 작품을 보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맥을 살펴보면, 화자는 세례자 요한이다. 그도 예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에게서 파견을 받았고, 그래서 마치 예수처럼 이야기하는 걸까? 이 단락에 이어 4,1-3은 유다에서 갈릴레아로의 지리적 이행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갈릴레아로 향한 여행 가운데, 예수는 사마리아에 있는 시카르라는 고울 우물가에서 잠시 멈춘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와 그 결과(4,4-42)는 요한의 드라마적인 능력을 잘 보여주는 첫 번째 예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은 한 개인 이상의 의미를 갖는 존재로, 예수와의 만남으로 특별한 형태의 믿음을 갖게 된 이들을 위한 대변인의 역할을 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여기서 인물묘사는 그녀가 처음 어떻게 믿음을 같게 되었고, 또 믿음을 갖는데 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마리아 여자는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여인들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에 분개하면서, 물을 달라는 예수의 요청을 거절한다. 그런데 예수는 그녀가 거절하는 것에 대해 응답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곧, 예수는 그녀에게 살아있는 물을 줄 수 있다고 답한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그녀는 살아 있는 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이라고 오해를 하고서는, 경멸하는 어투로 예수가 스스로를 야곱보다도 더 큰 인물이라 생각하는지 묻는다. 요한의 반어법에 따르면, 예수는 분명 야곱보다도 더 큰 인물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예수는 논지가 흐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지금 영원한 생명을 위해 솟아나는 물,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그런 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이어서 요한은 능숙한 필치로, 사마리아 여인이 지금 단순히 우물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의 차원에서 예수의 말에 매료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요한의 전형적인 문체로 예수가 또 다른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해 나가기 위해 초점을 여인의 남편에로 이동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응답은 일부만 진실이었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예수는 그녀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녀가 함께 살고 있는 그 남자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이 매우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계속 된다는 사실은 전혀 완전하지 못한 그녀의 삶이(그녀가 비록 이 점을 인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고자 하는 예수의 노력에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자신의 상황에 대해 예수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는 자신에 대한 더 이상의 탐문을 피하려고, 하느님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 지역의 그리짐 산에서 예배를 올려야 하는지에 대해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벌어진 신학적 논쟁을 떠올려 주면서, 종교적 차원의 논의로 넘어간다. 그러나 에수는 다시금 옆길로 새는 것을 피한다. 왜냐하면 구원이 비록 유다인에게서 오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 주제를 다루는 것이 부적절한 때가 오고 있고, 이며 지금 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두 거룩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는 이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로 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인은 다시 한 번 재빠르게 관점을 메시아가 오실 먼 미래로 돌림으로써 개인적 문제를 피하려 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녀가 논지에서 도망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내가 바로 그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그녀로 하여금 신앙에 대한 현재의 요구와 직면하게 만든다.
제자들은 우물이라는 중앙 무대로 되돌아 오는 반면, 여인은 고을이라는 뒷 무대로 사라지는데(4.27-39), 요한은 이런 이중 무대 기법을 이용해서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준다. 비록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있었지만 예수의 빵에 대해서 그들이 오해하는 것은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물에 대해 오해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것이었다. 여자는 주저하면서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녀가 자신의 생각에 긍정의 답을 바라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긍정의 답변은 그 마을의 사마리아인들에게서 주어지는데, 그들은 예수를 만남으로써 그를 믿게 된다(4,40-42). 그들은 그녀에게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라고 말한다. 이 답변은 요한의 신학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데, 바로 모든 이는 예수와 개인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마리아인들 역시 유다인들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던 요한계 역사를 반영해 준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드러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계속되는 대체라는 주제(여기서는 성전에서의 예배의 대체)와 사마리아인들은 더 공적으로 믿음을 고백하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2,23-25)과 니코데모의 적절히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모습이 대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나에서의 두 번째 표징(4,43-54)으로 이 하위 단락은 끝이 난다. 이 부분은 첫 번째 가나 이야기와 유사한데, 간청하는 이의 간청이 처음에는 거절되지만, 지속적인 간청을 통해 결국 그 간청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왕실 관리의 아들(휘오스,huios) 이야기는 백부장의 종(파이스, pais) 이야기의 세 번째 이문으로 보이며, 백부장의 종 이야기의 두 가지 조금 다른 이형들은 마태 8,5-13과 루카 7,1-10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이문들은 구두 전승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영어의 “boy”(파이스를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는 아들과 종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 요한의 주제들의 시퀀스에서 이행부에 해당하는 4,43-45는 사람들의 부족한 믿음 때문에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마르 6,4; 루까 4,24 참조). 이것은 예수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 힘으로 집으로 돌아가 결국 온 집안을 신앙으로 이끌었던 그 왕실 관리가 보여주는 믿음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사도 10,2; 11,14, 16,15, 34 참조). 니코데모에게 예수는 (생명을 주는) 위로부터의 출산/탄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쏫아 오르는 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제 예수는 왕실 관리의 아들에게 생명을 준다. 이것은 다음 하위 단락에서 다루어지는 핵심적인 내용을 준비해 주는데, 그 내용은 바로 아들은 자신이 바라는 이들에게 누구라도 생명을 허락한다는 내용이다(5,21).
③ 구약의 축제들과 그것들의 대체(5-10장)
5-7장에서 전개될 생명이라는 주제는 8-10장에서는 빛에 관한 주제로 나타날 것이다. 이 두 모티브들 모두 프롤로그에서 이미 다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지배적인 모티브는 이 하위 단락을 관통하는, 연속적으로 언급되는 유다교 축제들이며(안식일, 파스카, 초막절, 성전봉헌 축제), 각 축제일에 예수가 행동하거나 말하는 것은 축제의 의미있는 관점에 관한 것이며, 어느 정도 그 의미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행동이나 말이다.
안식일에 예수는 치료함으로써 생명을 주지만, 이것은 결국 적대적 대화로 넘어간다(5,1-47). 기적과 그 지거은 표징-가치를 드러내주는 담화/대화의 조합은 요한적인 기교다(6장도 참조하라). 여기서,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유다인들의 축제” 기간 동안 안식일에(5,9), 예수는 벳자타 연못에서 치료받기를 기다리던 한 절름발이를 치료해 준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는 예수의 말은 안식일 법을 깨트리는 것이다(후대의 성문화된 미쉬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가 “유다인들”에게 준 설명은 루카 13,15-16; 14,5에서와 같이 인도주의적인 측면에 대한 호소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마르 2,28과 그 병행구절에서와 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느 최고의 권위에 따른 것이다. 비록 사람은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되지만, 하느님은 그 날에도 계속 일하신다는 것이 그 논리로 보인다. 하느님은 예수의 아버지이며, 아버지는 이들에게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세를 주었다. “유다인들”은 예수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인식한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5,18). 따라서 예수에 대한 극도의 반감이 요한 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 보다 더 초기에, 그리고 더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신성에 대한 주장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연히 많은 학자들은 여기서 이중적인 면 한 가지가 드러난다는 점을 본다. 곧, 공생활 동안 예수가 겪은 적대감이 여기에 담겨 있고, 그 위에 예수의 제자들이 이후 겪은 경험들이 텃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유다 당국자들로부터 이신론(ditheism)을 신봉한다고 고소당하였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만듦으로써,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교의를 깨트렸다는 것이다. 5,19-30의 답은 미묘하다. 아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5,31-47에서 5개의 주장이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데, 마치 회당 논쟁들에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다른 사람)이 예수에 대하여 증언했다. 또한 세례자 요한도 예수에 대하여 증언했다. 예수가 행한 일들과 성경, 마지막으로 예수에 대하여 기록한 모세까지도 예수에 대하여 증언했다.
파스카 때 예수는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한 다음 생명의 빵에 대한 담화를 한다(6,1-71).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한 기적에 대해서는 공관복음에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첫 번째 기적이 있은 뒤에는 예수가 물 위를 걷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BGJ 1.239-44의 도표는, 몇 가지 사항에서 요한의 이야기가 공관복음의 첫 번째 이야기와 아주 비슷하며, 또 다른 몇 가지 사항에서는 공관복음의 두 번째 이야기와 비슷함을 보여주고 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예수의 반응을 준비하는 인물들 소개되는 것은 전형적으로 요한적이다(1,40.43-44;12,22). 그리고 요한복음은 이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에서 성찬례적 상징을 부각시켜 주는 듯한 특징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기적적으로 음식이 제공된다는 점과 물 위를 걷는 다는 것이 서로 연결되는 것은 첫 번째 파스카 이후 탈출 사건 때 모세가 일으킨 기적을 반향해 준다(만나, 홍해). 6,41에서 유다인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은 광야에서 방랑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행동과 비슷하다(탈출 16,2.8). 따라서 모세와 예수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비교할 수 있다. 모세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참빵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나를 먹었던 자들은 죽었기 때문이다(요한 6,32.58). 공관복음의 이야기에서는 빵과 물고기가 많게 되었을 때 그것들을 먹은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다음날 군중들이 예수를 찾아와 빵을 청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기적을 넘어서 진정 그 기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사실, 예수는 그들의 지상의 배고픔을 채워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주기 위해 왔다. 이어지는 담화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첫째, 요한 6,35-51에 따르면, 예수의 계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6,45), 예수는 생명의 빵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 아들을 믿어야 한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는 말은, 집회 24,21(20)의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약속을 반영하고 있다. 둘째, 요한 6,51b-58에서 예수는 또 다른 의미에서 자양분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6,35-51의 주제는 중복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성찬례를 떠올려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사실상, 6,51b의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는 말은 요한계 성찬례 정식으로 루카 22,19, 1코린 11,24의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와 비교될 수 있다. 요한 6장에 나오는 담화의 두 부분을 하나의 전체로 놓고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예수가 자기 제자들을 계시를 통해서 그리고 성찬례적인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서 양육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가르침을 듣고 몇몇 예수의 제자들은 “유다인들”과 같이(6,41-43.52) 그 가르침에 대하여 수군거린다(6,60-61). 예수의 활동과 관련된 측면에서, 이와 같이 호의적이지 못한 반응은 사람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기원하였다는 예수의 주장에 대한 것이다. 공동체의 삶과 관련된 측면에서, 이 수군거림은 성찬례가 가지고 있는 초월적 관점에 대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시몬 베드로와 열두 제자는 떠나지 않았던 이들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사도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열두 제자의 목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요한복음은 그들에 대한 존경을 계속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관복음의 신앙고백 장면에서 예수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말한다(마르 8,33; 마태 16,23). 하지만 요한 6,70-71에서는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길 마귀로 언급된다. 예수는 유다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다.
유다교의 다음 축제인 초막절(Tabernacles)은 7,1에서 10,21까지,곧, 10,22에서 성전 봉헌 축제가 언급되기 전까지 계속 되는 것으로 보인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했던 8일 간의 이 순례 축제는 9/10월의 포도 수확을 기념하기 위한 것 이외에도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를 그 특징으로 한다. 실로암 연못으로부터 긴 행렬이 날마다 계속되는데 이것은 헌주로서의 물을 성전으로 가져가기 위함이었는데, 이 성전에 있는 ‘여인들의 뜰’은 엄청나게 많은 횃불로 밝혀졌다. 물과 빛이라는 주제도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예수는 불신의 냄새를 풍기는 자신의 “형제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나서, 자기 자신의 원의에 따라 비밀리에(7,1-10)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예수에 대한 생각은 분열을 일으키는데(7,11-15), 이것은 예수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심판하게 한다는 요한의 주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 7,16-36의 예수와 “유다인들”의 대화는 모세 율법의 위반에 대한 이전의 적대감을 다시금 일어나게 하며, 결국 예수가 그렇게 오랫동안 그들과 머물지 않을 것이며 예수를 보낸 이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경고로 긑난다. 축제의 물이라는 주제를 대치하는 내용은 7,37-39에서 성전 봉헌 축제 마지막 날에 부각되는데, 예수는 자기 속에서 부터(더 가능한 독법)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생수의 강들은 예수가 영광스럽게 되었을 때 받은 것이다(19,34을 보라). 예수에 대해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때문에 그를 체포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난다(7,40--49). 이 때문에 니코데모가 다시 등장하는데, 그는 예수를 변호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그를 믿는 신앙인이라는 것을 여전히 고백하지 않는다(7.50-52).
이어지는 8,12-59에서, 예수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며, 축제의 빛 주제를 대체한다. 유다인의 비난에 대한 법정의 변론적 증언 분위기가 되돌아 오고, 상황은 매우 적대적이 된다. 곧, 그들이 사생아라는 주장, 또 그 적대자들의 아버지가 마귀라는 고발이 주어진다. 이 이야기는 예수가 발언하는 말 가운데 신약에서 가장 위엄있는 진술로 무마리 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8,58) 이 말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에게 돌을 던지려 한다(함축적으로 볼 때 신성모독 때문이란 말이다).
9장은 태생 소경이 어떻게 빛으로 나아갔는지를 기술하는데, 요한의 극적 이야기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이 대목은 단 한 마디의 말도 버릴 게 없을 정도로 아주 공을 들인 것이다. “세상의 빛”이라는 주제(9,5)와 실로암 못에 대한 언급(9,7.11)은 초막절과 느슨하게 연결시켜 주는데, 예수가 계속 예루살렘에 머물렀음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 태생 소경은 한 개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특별한 형태의 신앙-만남의 대변인으로 발전된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첫 번째 만남에서 예수를 믿게 되기까지 만나게 되는 방해물에 대한 예화다. 실로암 못의 물에서 눈을 씻은(실로암이란 이름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데, 요한 복음에서 이는 예수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 소경은 첫 만남에서 빛을 보지만, 예수가 참으로 누구인지는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는 한 인물의 예화다. 사실 그는 회당에서 심문을 받고 쫓겨난 이후에야 예수에 대해 참으로 알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는 요한 공동체에게 주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 곧, 고난을 통해 그들이 처음에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보다 더 깊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며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태생 소경에게 집중적으로 주어지는 일련의 질문들, 그를 회당에서 내쫓는 질문자들의 적대감과 맹목이 증가되는 것, 질문을 받으면서 오히려 예수에 대한 통찰력이 점점 더 증가해 가는 소경, 결과를 두려워하며 예수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를 거부하는 부모들의 태도, 이 모든 것들이 한 드라마 속에 기가막히게 녹아들어 전개되어 가는데, 이를 통해 드라마는 예수의 오심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어떻게 소경이 되어가고, 또 소경이었던 이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9,39)를 한 무대 위에서 모두 보여주고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착한 목자에 대한 비유적 담화(10,1-21)는 나름대로 독립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예수가 9,40-41에서 소경이라고 비난했던 바리사이들을 겨냥한 메시지다. 요한 복음에서는 공관복음에 나오는 그런 방식의 비유가 그리 많이 사용되지는 않는데, 이 단락과 15,1-17의 포도나무에 대한 기술은 요한 복음 내에서 그나마 공관복음에 자주 나오는 비유들과 가장 유사한 예들이라 할 수 있다. 요한 복음에는 동일한 실재를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보여주기 위한 은유들의 혼성이 있다. 곧, 에수는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문이다. 양떼는 그 문을 통해 양우리로 들어가기도 하고 목초지로 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 양떼의 이름을 알고 또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려 놓는 모범적 목자다. 예수의 사명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장면 속에 그려지는 바리사이인들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요한계 교회의 생활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그리스도의 주장에 맞서는 듯 보이는 인간 목자들(사목자들)을 끌어들이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판인 듯 보인다. 10,16에서 예수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는 다른 양들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한 양때와 한 목자를 만들고자 한다는 자신의 목적을 표현하는데, 이 유명한 구절은 복음이 쓰여졌을 때 예수의 제자들 간에 분열이 큰 문제였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에 오는 유다교 축제는 성전 봉헌 축제(하누카: 10,22-42)다. 이 축제는 시리아 통치 아래서 수년동안 성전이 더럽혀 진 후 마카베오가 제단을 봉헌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것을 기념한다(BC 164년). 예수가 성전 주랑에서 자신이 성부가 축성해서 세상에 파견한 이라고 외칠 때 이 축제의 주제는 대체된다(10,36). 예수 자신이 메시아라고 말했다고, 또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신성모독죄를 범했다고 사람들이 예수를 거슬러 제기하는 문제들은 예수가 죽기 직전 공관 복음이 이야기하는 산헤드린의 심문의 요지와 비슷하다(요한 10,24-25.36과 루까 22,66-71 참조). 사람들이 예수에게 돌을 던지고, 또 그를 체포할 수도 있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는 대담하게 선포한다.“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포함구조(inclusio)를 통해 복음사가는 이제 예수가 1,28에서 이야기가 시작했던 그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곳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여전히 메아리 치고 있다(10,40-42).
④ 라자로를 살리심과 그 결과(11-12장)
이 하위 단락은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예수는 소경에게 빛을 주었던 것처럼(11,37을 보라), 라자로에게 생명을 준다(11,1-44). 그리하여 자신이 행한 표징 가운데 가장 위대한 표징올 행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생명의 선물은 예수가 죽어야한다는 산헤드린의 사형 결정(11,45-53), 곧 예수가 영광스럽게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그 결정으로 이어진다. 태생 소경 이야기에서 표징-가치를 설명해 주는 대화는 치유 사건에 이어져 나왔다. 그러나 라자로를 살리는 이야기에서는 이 표징을 설명하는 대화가 표징 앞에 나온다. 라자로가 무덤에서 나온 뒤 대화가 나오게 되면, 마치 용두사미 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anticlimax). 대화에서 마르타는 이미 예수가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며(마태 16,16의 베드로의 고백과 비교해 볼만 하다), 그녀의 형제 라자로가 마지막 날에 살아날 것을 믿는다. 그러나 예수는 그녀를 훨씬 더 심오한 믿음으로 이끈다. 예수는 부활일 뿐만 아니라 생명이다. 그래서 그를 믿는 이는 죽지 않을 것이다. 라자로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은 마르타의 소망을 이루어주지만,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표징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라자로는 다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라자로는 매장 때 입었던 복장으로 온 몸을 감싼 채 무덤 밖으로 나온 이유다. 예수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왔다. 이 점은 예수가 무덤으로부터 나올 때 자신이 입던 아마포를 무덤에 남겨 놓고 나온 행위가 상징적으로 보여줄 것이다(20,6-7).
산헤드린 회의(11,45-53)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많아지자, 행여 로마인들이 민족과 성전의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많아짐으로써 로마사람들이 와서 민족과 성전(“거룩한 장소”)에 해를 가할까 두러워 소집되었다. 그 해의 대사제인 카야파는 예언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예수가 민족을 대신해서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은 이 말이 예수가 민족을 위해, 또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셔서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예수의 운명은 그를 죽이고자 계획한 산헤드린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리고 중간 구절들(11,54-57)은 파스카에 일어날 체포를 준비해 준다.
이어지는 두 장면은 공관 복음에도 병행 구절이 나오지만 그 순서는 반대다. 파스카 엿새 전에 베타니아에서 라자로의 자매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붓는다(요한 12,1-11). 마르 14,3-9; 마태 26,6-13에서도 이 행위와 매우 유사한 병행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파스카 이틀 전 베타니아에서 이름 모를 한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붇는다. 이 두 형태의 이야기는 모두 예수의 매장을 준비하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다음날 예수가 승리자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개선해서 들어가는 장면(요한 12,12-19)은 마르 11,1-10; 마태 21,1-9; 루카 19,28-40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장면과 밀접한 병행을 이룬다. 공관복음은 요한 복음에 비해 예수가 예루살렘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만 종려나무 가지가 언급되고 예수가 나귀를 선택했음이 언급되는데, 이는 예수가 바로 즈카르야 예언서에서 약속된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줄 임금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삽입된 것처럼 보인다(즈카 9,9-10).
이방인들이 도착함으로써 공생활이 마무리되었음이 알려진다(12,20-50). 이방인들이 도착하자 예수는 “때가 왔다”고 선포하며, 밀알 하나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죽어야한다고 말한다. 이 구절의 분위기는, 마르 14,34-36과 그 평행구절에서 죽기 전날 밤에 예수가 겟세마니에서 기도하던 그 분위기와 유사하다. 두 장면에서 예수의 영혼은 고통을 받으며/슬품에 차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는 아버지에게 그 시간이 자신에게서 지나쳐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그 시간을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것 때문에 왔기 때문이다. 예수가 보이는 이런 다른 반응들은 결국 후대에 예수가 가지고 있는 인성과 신성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보여준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라고 기도한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이름이 영광스러워지라고 기도한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여러 청원들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예수의 기도 스타일을 잘 반영해 준다. 요한 12,28-29에서는 하늘로부터 응답하는 소리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소리를 천사가 하는 말로 오해한다. 이것은 루카 22,43에서 예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천사가 나타나는 장면과 유사하다. 그리고 마태 26,53에서 예수가 자신이 청하기만 하면, 아버지가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보내주셨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용과 유사하다. 이것들은 모두 예수 전승이 서로 다르게 보존되어 옴으로써 생겨난 흥미로운 변이형의 예들이다. 요한 12,37-41에서는 군중들이 사람의 아들에 대한 선포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결국 그들이 결코 믿지 않을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사실, 산헤드린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을 두려워하며 고백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지 않았다(12,42-43).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는 복음사가 또한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고백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던 자기 시대의 시나고가에 속한 이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공생활 가운데 예수가 했던 마지막 말은 요한 복음의 메시지를 요약해 주는데(12,44-50), 이는 3,16-21에서 니코데모에게 했던 시작 요약과 유사하다. 빛이 세상에 왔는데, 이것은 그를 믿고 어둠에서 해방되는 이들과 그를 거부하여 심판 받는 이들 사이에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심판의 계기가 된다.
(3) 2부: 영광의 책(13,1-20,31)
13-20장의 주제는 13,1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 13,1은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갈 때가 되었으며,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랑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선포한다. 최후의 만찬을 기술하는 5개 장에는 오직 “그의 사람들”만이 현재하여 자신들을 위한 예수의 계획을 예수가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그리고 나서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술하는 삼개 장에서 예수는 영광스럽게 되어 자기 아버지에게로 올라가는데, 그는 이제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다(20,17). 이 영광의 책은 이와 같이 서언의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 준다(1,12-13):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었다.” 여기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예수의 이름을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그의 사람들”로 태생적으로 예수와 같은 민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① 최후의 만찬과 예수의 마지막 담화(13-17장)
모든 복음서에서 예수는 죽으시기 전날 밤에 일어난 식사에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담화가 훨씬 길게 이어진다.
가) 최후의 만찬 첫 단락들에서(13장). 요한의 이야기는 공관복음 자료와 병행을 이룬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 예수는 식탁에서 유다에 대해 말하고 나서 (그곳에서 혹은 그 뒤에) 시몬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빵과 포도주에 대해 예수가 말하는 대목 대신 요한복음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행위는 그의 제자들을 위해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한 자기 낮춤의 사랑의 행위다. 또한 요한에게 독특한 것은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의 존재다. 이 사랑받는 제자는 예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시몬 베드로를 위한 중재자로 행위하기 위해 예수의 품에 기대어 예수를 넘길 이가 누구인지 묻는다. 영광의 책에만 언급되는 이 사랑받는 제자는 예수와 가까우며 베드로와 대조된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뒤에 다루어지는 “저자와 사랑 받는 제자” 참조).
유다가 밤으로 나간 뒤(사탄의 어두움을 상징) 요한복음은 최후의 만찬에 대한 짧은 소개(13,31-38)를 제공하는데, 여기서 예수는 다시 한번 더 자신에게 다가올 영광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새 계명을 제시해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새로운”이유는 구약에서 사랑이 부족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 특별하게 두 부분을 수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사랑은 예수가 제자들을 위하여 죽고 부활함으로써 제자들에게 보여주었던 그 방식대로 이루어질 수 있고 또 그것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로마 5,8을 보라). 그리고 그 사랑은 동료 그리스도교 제자들에게 확장되어야 한다.
나) 예수의 마지막 담화 본문에서(14-17장), 예수는 자신이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사람들”에게 이야기 한다. 이 담화는 독특한 구성으로 되어 있으며, 마태오 복음의 산상 설교나 갈릴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중간중간에 선포한 루카의 예수 말씀 모음에 비할 수 있다. 요한의 담화는 최후의 만찬과 공적인 활동 기간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공관복음의 여러 자료들을 한번에 최종적 메시지로 제시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으며 이미 승천하여 영광을 받은 요한의 예수는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는 이처럼 이야기하기도 하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이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16,5; 17,11).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이러한 특징은 이 담화에 한 가지 영속적인 가치를 제공해 주는데, 그것은 바로 이 담화가 예수를 믿게될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예수의 메시지라는 것이다(17,20). 형식과 내용 면에서 이 담화는 “유언”(testament) 또는 고별사와 닮았다. 유언과 고별사에서는 화자가(간혹 아버지게 자녀에게) 자신이 이제 곳 떠날 것임을 알려주는데(요한 13,33; 14,2-3; 16,16 참조), 이것은 종종 슬픔을 자아내기도 한다(14,1.27;16,6. 22) 곧 떠날 것을 선포하는 고별사와 닮았다. 예수는 자신의 과거 삶, 말씀 및 행위들을 회상하면서(13,33; 14,10; 15,3.20; 17,4-8), 청자들에게 이 것들을 열심히 본받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능가하기를 촉구한다(14.12). 그리고 계명들을 지키며(14,15.21.23; 15,10.14), 서로 일치를 이루라고 촉구한다(17,11.21-23). 예수는 청자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희망하며(14,27;16,22.33),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17,9), 그들이 박해받으리라는 것을 예고하며(15,18.20; 16,2-3), 자신을 대신할 분에 관해 알려준다(보호자 구절 paraclete passage).
고별 담화 1부(14장). 떠남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다시 돌아와 그들을 자신에게로 데리고 가서 그와 함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며 제자들을 위로한다. 담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화는 잘못 이해된 질문을 던지는 이들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여기서 토마스의 질문(14,5)은 복음서에서 가장 유명한 선언 하나를 이끌어 낸다: “나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고 필립보의 질문(14,8)은 예수가“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다...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라는 말을 하게끔 만든다. 이런 상호적 신적 거주는 이제 성령(14,15-17), 예수(14,18-22), 하느님 아버지(14,23-24)가 그리스도교인들 안에 모두 거할 것이라는 주제로 넘어 간다.
성령을 보호자라고 칭하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성령을 말하는 중성 단어(pneuma)와는 달리, 문자적으로 볼 때 “곁에 불려온 이”를 의미하는 parakletos는 예수가 떠나신 이후 부름을 받은 성령을 묘사하는 인격적 칭호로, 그리스도교인들을 보호해 주는 “변호자”(advocate)요, 그들을 위로하는 “위로자”(consoler)다.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천상에 있는 아버지를 아는 길인 것처럼, 예수가 하늘로 올라간 뒤에는 예수로부터 모든 것을 받는 보호자가 예수를 알게 되는 길이된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 존래로 육화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머무는 것은 일시적이다. 반면에 보호자는 육화하지 않으면서 예수를 사랑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모든 이들 안에 거처하며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한다(14,15-16). 다음의 두 가지 요소들이 보호자의 특징적 요소들이다. 곧, 보호자는 자신을 알아볼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세상과 적대관계에 있으며(14,17), 예수가 말한 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주는 스승으로서 봉사한다.
두 번째 특징은 14장의 두 번째 보호자 구절에서 다루어진다(26절). 그리고 나서 예수는 평화의 선물을 주는데, 이와 더불어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다는 경고도 함께 주어진다(14,27-31b). 14장에 나오는 예수의 마지막 말씀(14,31c)인 “일어나 가자”는 말은 고별 담화의 끝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이며 18,1과 완벽하게 드러 맞는 듯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마지막 담화의 2부(15-16장). 14,31c 이후 세 개의 담화가 이어진다는 점이 매우 특이한데 많은 이들은 이 세 개의 담화들을 복음사가의 원 작품에 후대 편집자가 삽입한 것으로 본다(“요한 복음의 통일성과 일관성” 단락 참조). 16,4b-33가 마지막 담화 1부의 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청중이 이 주제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마지막 담화 버전이 있었고, 편집자가 이 버전을 버리지 않기 위해 삽입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어쨌든 하위 단락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15,1-17: 포도나무와 가지들. 10장의 목자 비유와 더불어, 요한이 보여주는 비유적/유비적 언어의 중요한 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종종 하느님이 선택한 포도나무 혹은 포도원으로 묘사되며, 하느님이 그들을 양육하지만 그들은 나쁜 열매만 맺는 그런 존재로 표현된다. 우리는 예수가 유다의 제도와 축제를 대체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제 예수는 자신을 새 이스라엘의 포도나무로 묘사한다. 예수에게 붙어이쓴 가지들인 그리스도인들은 포도 재배자인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포도나무는 시들어 사라지지 않을 것이지만, 가지는 떨어지면 치워지고 태워질 것이다. 몇몇 학자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관련된 이 이미지를 바오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 이미지와 비교하기도 한다(1코린 12,12-31). 그러나 바오로의 이미지는 그리스도교인들 서로 간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것인 반면, 요한의 이미지는 그들이 예수 안에 거처한다는 점에 관심이 맞추어져 있다. 이 이미지에 대한 예수의 설명 가운데 예수는 다시금 자신의 계명을 선포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5,7-17, 특히 12절; 13,34-35도 참조). 이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그런 사랑이다.
15,18절-16,4절a: 세상의 증오, 보호자의 증거. 예수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 사이에 사랑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세상이 그와 그가 세상으로부터 선택한 이들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첫 부분에서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3,16). 그런데 여기서 “세상’은 하느님이 세상을 구원하러 보낸 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예수가 와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은 이런 거부가 죄가 된다는 점을 드러낸다(15,22). 보호자는 와서 예수에 대해 계속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예수와 함께 있던 이들도 증언해야 한다(15,26-27). 그러나 그들은 이 증언 때문에 회당에서 추방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요한의 마지막 담화에서 이 부분은 마르 13,9-13의 최후의 만찬 이전에 예수가 건낸 마지막 연설의 일부와 유사하다(마태 10,17-22도 보라).
16,4b-33: 1부(14장) 주제들과 유사한 주제들. 16,4b-7에서 예수는 담화 시작 부분(14,1-5)에 자신이 떠나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말했던 바를 되풀이 하면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말하는데,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음을 알아 본다. 다시 한번 두 번에 걸친 보호자 구절이 다루어진다. 16,7-11에 나오는 첫 번째 보호자 구절은 보호자가 세상(그리고 이 세상 임금: 14,30 참조)과 대립한다는 주제에 있어서 14,15-17과 연결된다. 16,13-15에 나오는 두 번째 보호자 구절은 예수가 가르친 바를 새로이 가르친다는 주제에서 14,25-26과 조화를 이룬다. 14,16.26에서는 아버지가 보호자를 주거나 파견하는 것으로 언급되는 반면, 16,7에서는 예수가 보호자를 보내는 것으로 언급된다. 이것은 아버지와 그가 하나라는 예수의 주장(10,30)의 예증이다.
비록 앞서 만찬 때(13,33; 7,33; 12,35을 보라) 예수는 잠시 동안만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16,16-22절에서 그 주제가 발전되는 부분은 마지막 담화 어디에서도 비슷한 평행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의 고통스런 죽음과 뒤이어 일어나는 되돌아옴은 해산의 수고와 그에 따른 탄생과 비교된다(묵시 12,2.5에 나오는 메시아 탄생과 관련된 유사한 이미지를 살펴보라). 그러나 16,23-24은 청함과 받음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담화 1부에서 보았던 주제를 다시 한 번 찾아볼 수 있다(14,13-14). 16,25-33에서도 앞서 다루어진 몇 가지 주제들이 다루어 진다(16,27과 14,21.23의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하신다”; 16,28과 14,12의 “나는 아버지께로 갈 것이다”, 16,33과 14,27의 평화에 대한 약속). 그러나 비유로 말하는 것과 드러내 놓고 말하는 것을 비교하는 부분과 제자들이 흩어질 것을 예언하는 부분은 이 대목에서 처음 언급되는 새로운 부분이다. 예수는 담화 1부 마지막 부분에서 이 세상 임금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말하지만(14,30), 2부에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보다 단순한 말로 담화 2부가 끝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마지막 담화의 3부(17장). 마지막 담화의 장엄한 결론인 이 부분은 종종 예수의 “대사제의 기도”로 불린다. 예수는 자신이 세상에 파견한 이들을 위해(17,18-19) 자신을 희생하는 이다. 첫 부분에서(17,1-8) 예수는 아버지가 하라고 맡긴 모든 일을 이룸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냈기 때문에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아버지에게 기도한다. 곧 창조 이전에 가지고 있던 그 영광을 달라는 기도이다. 이것은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받을 영광의 목적은 아들이 아버지를 적절하게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17,9-19) 예수는 아버지가 그에게 맡긴 이들을 예수에게 맡겨진 그 이름으로 안전하게 지켜달라고 기도한다. 예수는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를 거부함으로써 악의 지배를 받는 영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영지주의적 구원자와 달리 제자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청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악한 자(이 세상의 임금)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기를 청한다. 예수는 아버지가 자신을 거룩하게 해 준 것처럼 그들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진리를 증거하라고 그들을 세상에 파견한다. 세 번째 부분에서(17,20-26), 예수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자신을 믿게 된 이들 위해 기도한다. 아버지와 예수가 하나임과 같이 그들도 서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10,16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요한이 살던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미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믿는 이들 사이에 완전히 이루어지는 일치는 세상에 확신을 주는 것일 것이다. 이 신자들에 대한 최상의 진술이 아버지에게 전해진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저를 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주신 당신의 선물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17,26)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요한 복음의 예수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십자가에 들어높여 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② 예수의 수난과 죽음(18-19장)
이 부분의 요한복음은 전반적으로 볼 때 다른 장들에 비해 공관복음(마르코)의 줄거리와 비슷하다. 비록 중요한 대목에서 세세한 부분은 서로 다르지만, 네 가지 사건, 곧 체포, 유다 대사제의 심문,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 십자가/무덤에 묻힘의 패턴은 동일하다.
키드론 계곡 건너편에서 체포됨(18,1-12). 최후의 만찬 이후 예수와 제자들이 갔던 장소를 공관복음은 겟세마니 그리고/혹은 올리브산으로 이야기한다. 요한은 예수가 겨울에만 물이 흐르는 키드론 계곡 건너편에 있는 동산으로 가셨다고 이야기한다. 마르 14,35에서는 예수가 이 문맥에서 이 시간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해 달라고 아버지에게 기도하는데,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가 이미 이 문맥에 이르기 훨씬 전에 기도를 바친 상태다(12,27-28). 이렇게 본다면 요한 복음 장면은 전체적으로 체포, 곧 아버지가 그를 위해 내어준 그 잔을 예수가 기꺼이 마시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cf 마르 14,36). 요한에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들이 있다. 곧, 유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예수는 그를 만나러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나다”라는 말로 자신이 바로 그들이 찾고 있는 이라는 것을 드러내자, 예수를 잡으로 온 이들, 곧 유다 성전 경비병들과 로마 군대는 예수 앞에서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진다. 요한 복음에 나오는 수난 사화 전체를 주도하는 예수에 대한 묘사와 일맥상통한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요한 10,18).
한나스의 심문, 베드로의 부인(18,13-27). 모든 복음서는 체포당이 예수를 유다 대제사장의 궁정으로 데리고가 당국의 심문을 받게 한다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예수에 대한 욕설/희롱에 관한 이야기와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에만 예수의 사형을 결정하기 위한 산헤드린 회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이것은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11,45-53). 그리고 비록 카야파가 언급되기는 하지만, 한나스가 심문한다. 베드로의 부인은 대제사장이 알고 있는 또 다른 제자와 함께 소개된다(요한에서만 등장하는 사랑하는 제자일 수 있다).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18,28-19,16). 모든 복음서는 대제사장이 예수를 로마 총독에게 재판을 받게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이 재판이 공관복음 보다 훨씬 극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무대 설정이 되어 있다. “유다인들”은 대제사장의 집 밖에 있고 예수는 안에 계시다. 빌라도가 고집불통의 두 적대자들을 화해시키기 위하며 얼마나 왔다 갔다하는지 7개의 이야기로 기록하고 있다(BGJ 2.859의 도표). 오직 요한복음만이 예수를 왜 빌라도에게로 데리고 왔는지(18,31, 유다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또 예수가 그러한 형벌을 받을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빌라도가 사형을 선고하였는지 분명하게 설명해준다(19,12,자칭 왕이라고 하는 자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으면 황제를 반역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빌라도에게 거의 침묵하시는데, 여기서는 예수가 자신의 왕됨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더구나 실제 문제는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아니라,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유다인들”이 인정한다(19,7). 빌라도는 그가 과연 진리에 속한 자인지에 관해 의심한다(18-37). 그래서 이 장면은 예수님 앞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재판받는 것이 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실제로무 권세도 행사하지 못하였다(19,11). 로마 군인들의 채찍질 후(마르/마태에서는 유죄선고 이후 끝에 나타남) 재판의 중심으로 이동하여,빌라도는 유명한 말 '보라 이 사람이로다(Ecce homo)라고 말하면서 “유다인들”에게 조롱받고 학대받은 예수를 제시한다. 이때 빌라도는 혹시 그들이 사형 판결의 소망을 버리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비록 빌라도가 예수가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유다인들”은 “우리에게 가이사외에는 왕이 없나이다”(19,15)라고 말함으로써 기꺼이 메시아적 기대를 포기하였다. 빌라도를 통하여 요한은, 예수에 대한 판단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자신의 주제(9,18-23; 12.42-43)를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십자가 죽음 및 매장(19,1T42). 여기서도 요한복음은 공관복음 보다 더 극적이다. 전승의 °세부사항들로부터 주요한 신학적 사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약간다른 표현을 사용하지만, 4개의 복음서 모두는 유다인의 왕’ 이라는 고소를 언급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이 빌라도가 예수에 대한 진리를 인정하는 마지막 기회가 되고 있다. 그는 황제의 묘비 문체인 세 가지 언어로 이것을 선포한다. 4개의 보음서가 모두 예수의 옷을 찢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결과적으로 로마 군인들이 최대한 성경을 성취시킨 것이 되고 있는데’ 이는 예수가 어떠게 보호받고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한 예가 되고 있다. 예수가 “죽으신 후, 다른 복음서들은 갈릴레아 여자들이 멀리 서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그들이 예수가 아직 살아계신 동안 십자가 가끼이에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한다. 요한 보음만이 언급하는 두 인물이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고 있다(예수의 어머니와 그가 사링하시는 제자). 예수는 그들을 어머니와 아들 관계로 이끄시며 예수에게 어머니요 형제인 제자들의 공동체를 이루신다(요한복음을 보존시킨 공동체). 이와 더불어 요한의 예수는 십자가에서 마지막 말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의 영혼을 뒤에 남겨둔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넘겨 주신다(19,30). 죽은 예수의 몸을 찌르는 장면은 요한 만의 독특한 것이며. 예수님 안에서부터 성령을 상징하는 생수가 흘러넘친다는 7장 37-39절과(파스카 양의 뼈는 부러뜨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하느님의 양이라는 1장 29절을 성취하는 장면이다. 요한에게 독특한 점은 니코데모(3,1-2; 7,50-52)로,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드러내놓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 그가 다시 등장하여(전승의 아리마대 요셉과 더불어,그앞에서 예수의 영예로운 장례식을 행한다. 이는 예수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는 예수의 약속을 성취한 것이다(12,32).
③ 예루살렘에서의 네 장면과 부활하신 예수를 믿음(20,1~29)
루카복음이나 마르코 복음 16장 9-20절과 비슷하게 그러나 마태나 마르코 복음 16장 1-8절과는 다르게, 요한복음 20장은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신 모든 장면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것으로 기록한다. 갈릴레아에 나타나셨다는 언급은 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믿음의 반응은 4가지로 극화되고 있다. 둘은 빈 무덤에서 일어났으며, 둘은 제자들이 모인 방에서 일어났다. 두 번째와 네 번째 장면은 개인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막달라 마리아와 토마스). 일부 자료는 공관복음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평행을 이루는 자료와 새로운 자료의 배열은 요한이 예수와의 개인적인 만남을 선호하고 있음을 반영해 준다.
무덤에서(20,1ᅳ18).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와서 빈 무덤을 발견하고, 이것을 시몬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에게 알려줌으로 이루어진 서론(20,1-2)은 무덤에서의 두 장면을 예비한다. 첫 장면(20,3-10)은 시몬 베드로와 사링하는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을 담고 있다. 둘 다 들어가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을 본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만 믿었다. 요한복음 저자는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던 첫번 제자라는 전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루까 24,34; 1코린 15,5).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를 높여주고 싶은 그의 소망 때문에, 요한은 그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기 전에도 혹은 성경의 예언적 말씀이 회상되기 전에도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 제자가 처음으로 완전하게 믿었던 제자가 되고 있다. 두 번째 장면(20,11-18)은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돌아와 거기서 두 천사를 만난다. 천사들이 그녀에게 말을 해도 또 예수가 갑자기 등장을 하여도, 그녀는 예수를 동산지기로 잘못 착각하였고, 믿음을 갖지 못한다. 예수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믿음을 갖게 된다(10,3-4의 선한 목자 비유가 설명하는 주제의 한 예, 그는 그의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전하라고 보내진다. 부활/승천의 결과로, 그들은 예수의 아버지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이제 예수의 형제로 불리워진다. 프롤로그에 의하면(1,12), 예수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전형적인 요한의 견해에 따라서, 무덤에서의 이 두 장면은 부활 믿음을 예수와의 친밀함과 관련시킨다. 이제 복음서는 보다 더 전승의 성격을 띠고 있는 장면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믿음과 의심이 부활하신 예수님 자체를 맞이하고 있다.
방 안(20,19-29) 첫 장면(20,19-25)은 부활절 주일날 밤에 제자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은 장소에서 일어난다. 여기에는 열두 제자에 속한 사람들이 관여되고 있으며(24절), 예수가 열한 제자(열둘에서 유다를 제외)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사명을 주어 보내시는 다른 복음서의 절정과 그 장면이 비슷하다(마28:16-20; 루까 24,33-49, 마르 16,14-20). 14장 27절 및 16장 33절과 비슷하게 평강을 말씀하신 후. 요한의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일을 계속하라는 사명을 주신다. 상징적인 행동으로, 예수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며 죄를 사하는 능력을 가진 성령을 주셔서, 죄에 대한 예수의 능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도록 하셨는데, 이는 하느님이 첫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던 하느님의 창조적인 호흡(창세 2,7)이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요한 3,5~8)을 생각나게 한다. 다른 복음서에서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신 장면에는 언제나 열한 제자의 불신적인 요소가 나타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의심이 너무 분명하게 보이는 토마스에 의해 그와 같은 요소가 더욱 극적으로 구체화되고 있다(24-25에서 이것은 다음 이야기의 전환점 역할을 한다).
두 번째 장면(20'26ᅳ29)은 일주일 후 같은 장소에서 토마스가 함께 있을 때 일어난다. 비록 토마스에게 제공되는 증거, 즉 토마스의 손가락으로 예수의 손을 만져보고 토마스의 손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보라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질 수 있는 육체의 모습으로 제시하는 것이지만, 토마스가 예수를 만졌다고 이야기하지 않음을 주목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였다면. 그것은 아마도 토마스의 불신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예수를 만지지 않고 기꺼이 믿음을 가짐은 순수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신을 명확히 드러냈던 자가 이체는 복음서 중에서 최고의 그리스도론적 고백을 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고 있다(나의 주시며 나의 하느님이시니이다’). 프롤로그의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니라’는 말씀과 포함구조(inclusion)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보지 않고 그를 믿는 모든 미래의 세대를 축복하신다(20,29). 따라서 요한이 처음부터 끝까지 글을 쓰면서 복음서의 청중들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복음서 결론(20,30-31), 기록 목적에 대한 진술. 누가는 복음서 처음부터 그의 목적을 설명한다(1,1-4).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기록 목적에 대한 설명을 끝까지 간직해 두었다. 복음서에 포함될 자료를 선택할 때, 그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거나 증진시키는 것이었다(논쟁이 되고 있는 독법).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하여 그의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진술은 복음서의 계속되는 강조점과 일치한다. 그러나 마치 주된 목적이 목격자의 증언을 보도하는 것처럼, 요한복음을 문자주의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4)에필로그(21,1-25)
비록 복음서가 20장 끝에서 끝맺음을 하고 있지만,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이 나오는(이때는 갈릴레아에 나타나심) 그 뒤의 한 장이 또 다른 결론을 이루고 있다. 21장은 두 장면을 담고 있다. 하나는 고기잡는 것과 관련된 것이며(21,1-14), 또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가 시몬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보존하고 있다(21,15-23). 두 장면을 연결시킬 수 있는지 또 그들이 내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의심스러우나, 주제들은 신학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첫 장면(21,1-14)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데(20장에 의하면 그들은 두 번 예수를 보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장면은 루카복음 5장 4-11절의 공적인 활동 기간 동안 행하신 기적적으로 엄청난 고기를 잡았던 장면과 유사하다. 시몬 베드로가 153마리의 물고기를 물가로 끌어 올리지만 그물은 찢어지지 아니하였다. 그 이투부터 물고기를 잡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나된 공동체에 사람들을 이끄는 선교 활동의 성공을 상징하게 되었다, 21장 7절에서 부활히신 예수를 알아본 첫 번 제자가 사랑하는 제자임을 통찰력있게 인식하고 있음은 요한의 특징이다. 물고기를 물가로 끌어올리기 전에, 9절에서 예수가 갑자기 해변에 물고기를 차려 놓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이 장면의 통일성이 의심받는다. 예수가 빵과 고기를 차려 놓으신 식사(12-13절)는 식사시에 나타나셨던 부활하신 예수의 요한적인 형태로 종종 성찬례의 성향을 갖고 있다(6장을 보라).
두 번째 장면(21,15-23)은.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는 장면은 한쪽으로 제쳐두고, 갑자기 예수가 양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이야기하시는 장면으로 이동한다. 아마도 이것은 베드로의 이미지의 두 번째 단계를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복음전도의 사도 (물고기 잡는 사람)로서 알려진 베드로는 이제 목회적 돌봄의 한 모델이 되고 있다(목자, 벧전 5,1-4; 행 20,28). 이러한 발전은 교회 조직에 대한 요한 공동체의 후기 허용과 관련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10장에서는 예수를 유일한 목자로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격 요건은 요한의 이상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베드로의 목자됨은 예수에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양무리는 여전히 예수에게 속해 있다(‘나의 양’), 그리고 베드로는그 양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야 한다. 사랑하는 제자가 갑작스럽게 등장함으로 인하여 이 장면의 통일성이 약간 문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와 배드로 사이의 대조는 요한의 특징이다 베드로가 사도적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는 전통은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제자는 그러한 권위를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베드로에게 없는 중요한 지위를 여전히 차지하고 있다(이 제자는 예수가 돌아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이 말(21,23,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이 요한 전승으로 유포되었는데, 이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보여주고 있음은 이 제자가 죽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21,24-25의 결론은 사랑하는 제자가 복음서 이야기를 지탱해 주는 증인으로 밝혀주고 있으며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해 주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과 같은책이라 할 지라도 예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담을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기키고 있다!
3. 요한복음은 순수한 복음서인가? 자료들의 결합인가 아니면 전승의 발인가?
요한복음은 마르코 복음과 마태 및 루카복음을 복음서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복음서라 할 수 있는가? 대다수의 견해에 따르면, 공관복음은 그 뿌리가 예수가 실제로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기억이다. 비록 그러한 기억들을 담고 있는 자료가 선포(그리고 최초의 기록?)의 과정에서 선택되고 신학적 사상이 반영되고, 이야기가 다듬어지기도 하며 단순화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예수에 대한 기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20년대 후반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과 30년에서 70년 후에 기록된 최종적인 문서를 구분시켰다. 요한복음도 그렇게 기록된 것인가?
2세기에서 18세기까지,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인 요한은 벌어진 사건들을 기억하여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였다는 가정 하에서, 그 질문에 긍정적인 답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요한의 복음서는 마르코 복음이나 루카복음 보다 더 확실한 안내자였다. 왜냐하면 마르코 복음이나 루카복음은 목격자가 기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는, 요한 사도가 나이 먹어 다른 복음서를 읽어 보았고, 좀더 기억나는 일들을 묵상하여 그가 직접 보충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가정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최근 200년 동안, 보다 비평적인 견해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보충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그런 흔적이 요한복음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또 그가 언급하지 않는 공관복음 자료들과 그의 자료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았음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복음은 목격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견해로 움직였다. 처음에 그와 같은 인식은 역사성과 관련하여 양극단을 왔다 갔다하게 만들었다. 요한복음의 자료는 역사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다(공관복음의 자료들과는 다르게). 이러한 접근 방법은 처음에는 예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요한복음의 저자는 전적으로 공관복음에 의존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공관복음 자료들을 가지고 상상하여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있는 수많은 연구로 인하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그 후에 제 4복음서의 저자는 공관복음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비역사적인 자료에 의존하였다는 견해가 등장하였다. 세 자료에 관한 불트만(Bultmann)의 이론이 많은 관심을 모았다. ① 보다 큰 모음집에서 선택된 자료들로 구성된 기적(세메이아, Semeia) 자료. 불트만에 따르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기적들은 기적을 행하는 자들을 믿었던 세상에서 예수를 그들보다 더 뛰어난 이미지로 만들기 위하여 만들어낸 허구적인 이야기이다. ② 원래는 아람어의 시문 형식으로 되어 있었던, 하늘로부터 내려온 계시자의 담화로 구성된 계시적인 담화 자료. 이것들은 그리스어로 번역이 되고’ 각색이 되어 요한에서의 예수의 담화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그 이후에 표징 자료들과 결합되었다. ③ 공관복음 자료에 의존하고 있는 수난과 부활 기사. 20세기 중반 경 진동의 추는 반대편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의 슈바이쩌 (E. Schweizer)와 룩슈틀(E. Ruckstuhl)의 연구는 불트만이 제안한 세 가지 자료 모두에서 똑같은 문체적 특성을 발견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제 4복음서의 저자가 세 가지 자료를 모두 직접 기록하였다는 제안 즉 불트만과 반대의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다드(Dodd, Historical)는 공관복음의 전승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전승이, 요한복음의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가끔 나타난다고 주장함으로써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른 복음서도 발전의 세 단계를 겪고 있기 때문에. 요한 복음도 다른 복음서와 다르지 않은 복음서라는 이론을 따르는 자들이 생겨났다(내가 지지하는 이론). ① 처음에는 예수가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공관복음에 보존된 것(특히 마르코 복음)과 같은 기억들이 아니다. 아마도 이 차이는 공관복음 이전 전승과는 다르게, 요한의 기억은 규범화된 사도적 기원을 갖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아래의 저자를 보라). ② 그 후에 이 기억은 이를 보존하였던 요한 공동체와 이를 설명하였던 요한 공동체의 선포자들의 삶의 경험에 영향을 받았었다. ③ 최종적으로 복음서 저자는 생동감있게 창조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선포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두 번째 단계의 전승을 기록된 복음서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모두 예수에 대한 독자적인 증거로 구성될 수 있었다. 즉, 그 증거는 초기 전승을 보존하기도 했으며 또 예수에 대한 메시지가 이후의 신자들의 세대에 적용됨에 따라 신학적 사고를 겪기도 하였던 증거이다. 비록 요한복음이 가장 신학적 성향을 많이 띠고 있는 복음서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지만, 신학적 차이는 신학적 통찰력을 얼마나 강도있게, 창조적으로 또 풍부한 상상력으로 예수에 대한 기억과 결합시키는가에 달린 것이다.
비록 방금 기록한 접근 방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기는 하지만, 20세기 말 요한복음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찬성하는 접근 방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복음서의 자료들(혹은 최소한 보통 7개의 표징으로 되어있는 표징 자료들)을 아주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비역사적이라고 하는 불트만식의 판단조차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복음서가 나온 공동체와 자료가 나온 공동체가 같은 공동체라고 추정하기도 하기 때문에, 자료와 그 이전의 것 사이의 차이는 약간 불분명하다. 공관복음과의 관계에 있어서, 비록 대다수의 사람들이 요한이 공관복음을 의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요한이 마가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공관복음도 의존하였다고 분명하게 주장하는 그룹도 있다(그들의 주장은 결정적으로 F.Neirynck에 의해 강조되었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아래 항목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4.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비교
제4복음서와 처음 세 복음서와의 비교는 분명히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요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예수는 자신이 세상에 오시기 전 하느님과 함께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고 계셨다(요한 17,5)는 것, 공적인 활동은 갈릴레아 보다는 주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다. 하느님 나라라는 주제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오직 3,3, 5에만 나옴), 비유 보다는 긴 담화나 대화들, 귀신들린 자가 나오지 않음, 아주 제한된 수의 기적들(7개?). 이 기적들 중 일부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가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함,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치료하심, 라자로를 살리심). 프랑스 학자인 솔라쥬(B.de Solages)의 통계적인 연구에 따르면(1979), 요한의 수난 내러티브 가운데 15%가 마가와 평행을 이룬다. 마태와 누가의 수난 내러티보가 마가와 병행을 이루는 것은 그보다 4배가 더 많다.
그렇지만 공관복음과 중요한 유사점들도 있다. 세례자 요한을 다루는 처음 시작의 활동 이야기와 수난 및 빈 무덤의 결론 부분의 이야기에서 유사점들을 특별히 볼 수 있다. 특히, 마가와 가장 유사하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6장과 마르코 복음 6장 30-54절; 8장 11-33절이 공유하고 있는 사건들의 순서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요한 12,3), 300 데나리온(12,5) 및 200 데나리은(6,7)과 같은 단어들이 아주 비숫하다. 누가와도 평행도 존재한다. 그러나 표현보다는 주제와 평행을 이루는 것 들이 많다. 예, 마르다와 마리아, 라자로(누가에서는 비유적) 및 한나스와 같은 인물들, 가이바 앞에서의 밤 재판이 없음, 빌라도의 재판 때 ‘죄가 없다’는 세 번의 진술.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이 예루살렘에서 그의 남자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기적과 같이 엄청난 고기를 잡음(요한 21장). 마태와는 이보다는 유사점이 적다. 그렇지만 요한복음 13장 16절과 마태 10장 24절. 요한복음 15장 18-27절과 마태 10장 18-25절을 비교해 보라.
여러 가지 해결책이 제안되어왔다. 그 다양한 해결책 중 한 극단은 요한이 마가에 대하며 혹은 세 공관복음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이와 같은 제안은 요한도 독자적인 전승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다). 또한 극단은 제4복음서 저자가 공관복음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요한복음과 다른 복음서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점들에 대해서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전승들은 같은 행동이나 말씀을 여러 가지로 변형시켜 독자적으로 재생산한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양극단 사이의 중간 입장(내가 지지하는 것)은 마가와 요한이 공통된 복음서 이전의 전승들, 구전 혹은 기록 전승들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비록 제 4복음서 저자가 루카복음의 최종 형태를 보지는 못하였다 할지라도, 후에 루카복음에 병합된 전승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의 복음서 저자와 마지막 편집자를 구분하는 사람들은 오직편집자만이 공관복음 중 하나나 그 이상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한다.
5. 요한복음의 통일성과 일관성
만일 우리가 요한복음에 사용된 자료 문제를 한쪽으로 제쳐 둔다면. 남는 문제는 요한복음이 일관된 하나의 통일체인가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여기저기에서 갑작스러운 장면전환이 나타난다(aporias라고 불리워짐). 예를 들면, 4장은 이주 짧은 장면전환으로 인해 갈릴레아에서 끝을 낸다. 5장에서는 예루살렘에 계신 예수를 언급한다. 6장에서는 예수가 갈릴레아로 돌아오신다. 일부 학자들은 원래의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가정 하에 이 장의 순서를 4장, 6장, 5장으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사실상, 주석가들은 재구성된 순서에 따라 기록하며 왔다. 이와 같은 재배열의 제안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한다. 첫째, 그러한 배열을 지지해주는 사본상의 증거가 없다. 그리고 요한의 순서는 우연히 혼동하여 일어난 것이라는 이론은 전적으로 상상에 의한 것이다, 둘째. 재배열한 순서도 여전히 문제를 갖고 있다. 즉 표현의 변화를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4, 6. 5장 순서는 지리적인 순서로는 더 낫겠지만, 5장 끝에서 7장 처음으로 넘어가기에는 어색한 면이 있다. 셋째, 그와 같은 재배열은 무엇인가가 복음서 저자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그렇지만, 요한은 극히 도식적으로 예수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으며, 장면전환이 신학적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여 그것을 꺼려하지 않는다(예, 1-2장의 계속되는 날들). 예수님 활동의 골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2, 5, 6, 7장 및 10장에 나타나는 일련의 축제들에서, 축제들 사이에 긴 시간차가 나타나는 것에 아무 관심이 없다. 누군가가 최종적인 형태로 된 복음서에 책임을 져야했다. 그리고 구태여 부적당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면, 또 그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면, 그는 순서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고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몇몇 장면 전환의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며 또 다른 해결책을 제안할 수도 있다 가장 어색한 부분은 아주 분명하게 복음서의 끝을 이루고 있는 20장 30-31절이다. 여기서 저자는 선택할 수 있었지만 선택하지 않았던 또 다른 자료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이후에 여전히 또 하나의 장(21장)과 또 다른 끝부분(21,24-25)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복음서의 이전 형태가 완성된 후에(그러나 복음서의 어떤 형태이든 보존된 형태가 유포되기 전), 누군가가 첨가를 하였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추측컨대. 이 사람은 복음서의 이전 형태를 완성하고 이제 부분적 변경을 한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라면 자신이 이전에 복음서를 끝냈던 20장 30“31절 이전에 21장의 자료를 집어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복음서는 두 사람의 작품으로 생각된다(복음서의 본론을 완성한 복음서 저자와 후에 첨가한 편집자).
그렇다면, 이 편집자의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그러한 작썹을 하였는가? 복음서의 주요 부분들을 편집으로 돌려버린 불트만은 교회적인 편집자(Ecclesiastical Redactor)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이 접근 방법에 의하면, 복음서 저자에 의해 남겨진 글은 신학에 있어서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다 많은 교회에서 수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며(그래서 “교회적”(Ecclesiastical]이다). 일종의 검열관이 여러 부분들을 첨가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비성례전적인 복음서에 교회적인 편집자가 3장 5절의 세례와 6장 51b-58절의 성찬례 및 19장 34b-35절의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한 성례에 관한 언급을 첨가하였다. 예수의 활동으로 이미 실현되었던 마지막 일들(하늘로부터 오심, 심판, 영생)의 의미를 이해하였던 복음서에, 교회적인 편집자가 마지막 심판이라는 주제를 첨부하였다(5,28-29; 12,48). 그와 같은
검열관을 가정하는 것은, 주“반대 형태가 주류를 이루는 현대적인 성향을 너무 띠고 있어서, 편집자 이론에 합당치 못하다.
훨씬 가능성 있는 제안은 복음서 저자의 작품에 첨가의 노력을 한 자는 본질적으로 그 작품과 의견을 같이 하며 똑같은 사상을 가진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첨가되었다고 하는 부분의 문체는 이미 기록되어 있었던 것을 존중하고 있으며, 이미 확립된 형식을 함부로 바꾸고자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20장의 조심스럽게 배열된 부활의 모습들을 깨기보다는 20장 30-31절의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결론 부분 이후에 부활의 모습이 들어있는 장을 첨가한다(21장). 편집자가 첨가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몇 가지 형태의 자료가 존재한다.
(1) 빠뜨린 자료. 보다 큰 전승 본문의 몇 가지 증거들은(20,31, 21,25)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중어떤것은복음서 저자가알지 못했거나그의 목적에 합당하지 않 았을지도모른다. 예, 갈릴레아에 나타나심.
(2) 이중적인 자료. 요한복음의 마지막 형태에서, 본질적으로 예수의 똑같은 말씀을 약간 변형시킨 모음집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3장 31-36절(화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은 3장 7절, 11-13절, 15-18절에서 말씀하신 것들을 되풀이한 것으로 보인다. 16장 4b-33절의 일부분도(최후의 만찬에서의 말씀, 이것은 14,31에서 예수가 떠난다고 하신 후 상당히 뒤의 일이다) 14장에서 이미 설명된 주제와 아주 비슷하다. 그리고 6장 51b-58절은 6장 35-51절a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있다.
편집자는 그러한 자료를 왜 복음서 저자의 작품에 첨가하였는가? 첨가된 것으로 제안된 부분들의 성격으로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가끔 첨가된 자료는 의미가 있을 정도로 말투나 강조점이 독특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것이 전승 속에 있었기 때문에 또 편집자가 그것을 빠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첨가하였을 수도 있다. 또한 첨가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들은 다른 신학적 강조점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는 만일 공동체의 사상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였다면. 이것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면, 6장 51b-58절은 생명의 빵의 성찬례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계시로서의 빵에 관한 강조점 혹은 6장 35정1절a의 가르침을 보충하고 있다. 이것을 교회의 검열에 의해 고쳐진 것으로 담화시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생명의 빵에 관한 담화의 기적를 이루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6,1-15)에
나 성찬례에 관하며 이미 상징적으로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시몬 베드로에게 양을 먹여야할 책임을 부여한 21장 i5_17절의 대화는 필요성에 의해 첨가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예수를 유일한 목자로서 생각한 공동체 안에서, 그것은 인간의 목회적 권위를 발전(요한일서에서 볼 수 있는 분열에 의해 필요해진 발전)시킬 수 있는 정당성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예에 의해서, 만일 편집자의 첨가 동기가 계속되는 공동체의 역사적인 상황에 의해 촉구된 것이라면, 첨가된 자료 자체가 반드시 후기의 것이라고 결론지어서는 안된다. 베드로의 순교 방법(21,18)에 대한 말씀과 사랑하는 제자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21,23)에 대한 말씀은 아주 모호하여, 그들 각각의 죽음 이전에 이야기된 것이 분명하다. 어떤 경외는 편집자가 옛 전승을 살려서 포함시킨 것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 편집자의 이론은 기껏해야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들만을 해결해 줄 수 있다.
6. 저자와 사랑하는 제자
복음서는 겉으로 보기에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19,26)인 십자가의 증인(19,35)에 주의를 기울인다. 요한복음 21장 20절, 24절은 무명의 사랑하시는 이 제자가 증거도 하였고 “이 일들을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레네우스(Irenaeus, 주후 180년경)는 이 제자가 트라얀 시대까지(98년경) 에페소에 살았던 요한(열두 사도중 한 사람)이라고 언급한다(소년이었을 때 이레네우스는 서버나[smyma]의 감독이었던 폴리갑〈Polycarp>을 알았는데, 폴리갑은 요한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사랑히는 제자와 복음서 저자를 요한(제베대오의 아들)과 동일시함은, 그가 협력자였다는 약간의 변형과 더불어, 그 후에 교회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p. 182), 한 세기 전에 살았던 인물들에 대한 그와 같은 2세기 말의 추측은 종종 단순화되었음이 인정되고 있다. 또한 저자 전승은 가끔 실제적인 저자 보다는 성경 문헌의 권위와 더 관련있었음이 인정되고 있다.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이 복음서도 예수의 공생활의 목격자께 의해 기록되었음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의심한다.
누가 사랑하는 제자인가? 세 가지 제안이 있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신약의 유명한 인물을 제시한다. 전통적인 후보가(제베대오의 아들 요한) 외에, 라자로, 마가 요한 및 토마스(Charlesworth)를 제안하기도 한다. 각각의 인물을 지지하는 구절들이 있다할지라도, 요한을 지지하는 오랜 전승이 거부된다면, 다른 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둘째, 사랑하는 제자를 완전한 제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순수한 상징으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의 이름이 밝혀진 적이 없다는 것과 공관복음의 우리에게 알려진 장면에서 그와 같은 인물이 언급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가 베드로와 더불어 등장하였다는 것은 역사성이 없다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룸이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요한의 인물은 예수의 어머니로(2,3-12, 19:25-27), 그녀도 상징적 역할을 하면서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곳에 나타난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역사적 인물이다. 열두 제자 모두 도망하였을 때 사랑하는 제자가 십자가 밑에 있었다는 것은 오직 그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도 아니요 사도(요한복음에서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용어)도 아니라는 것만을 알려줄 뿐이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의 학자들은(나는 이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의 활동 기간 동안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인물로, 보다 더 공식적인 공관복음 전승에서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였다는 이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인물이 요한 공동체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기 때문에(아마도 공동체의 설립자), 그는 요한복음에서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사랑으로 예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정도로 베드로와 대조를 이룰 수 있었다.
사랑하는 제자가 복음서 저자였는가? 이것은 요한복음 21장 20절, 24절의 영향일 것이다. “이 일을 기록한 제자” 그러나 이것이 21장을 첨가한 편집자가 단순화시켜서 보다 더 세밀한 19장 35저의 말씀을 담화시킨 것일 수 있는가?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밀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19장의 말씀은 사랑하는 제자가 복음서 저자가 아니라 예수를 목격한 자로, 제 4복음서에서 사용된 전승의 근원이었음을 밀하는 것일 수 있다. 이 구절을 기록한 복음서 저자는 사랑하는 제자의 제자 혹은 추종자일 수도 있다(사랑하는 제자를 3인칭으로 묘사). 그래서 자신을 활동의 목격자로 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상, 만일 요한서신들의 또 다른 저자와 복음서의 편집자를 모두 가정한다면, 이는 “요한 학파” 즉 이 공동체의 전통적이었던 스타일과 자료(일부 혹은 전체적으로 이것들은 사랑히는 제자가 형성한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를 사용하는 여러 제자들을 가정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주장은 요한의 일부 요소들이 어떻게 해서 예수의 활동과 같은 기원을 가질 수 있는지, 또 그 반면에 그 외의 요소들은 어떻게 해서 예수의 활동과 그렇게 동떨어져 보이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다.
① 팔레스타인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요한은 베타니아(11,18),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동산(18,1), 성전 안 솔로몬 행각(10,23), 벳세다 연못(5,2)과 실로암 연못(9,7) 및 반석이란 곳(19,13)의 위치를 알고 있다. 이 지역들은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또 가끔 외적 증거들이 요한의 정확성을 지지하기도 한다. 또 다른 요한의 지리적 언급들은(1,28의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 3,23의 살렘 가까운 애논)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름들을 순전히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주의하여야 한다.
② 유다적인 것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유다인의 축제가 5장 9절b; 6장 4절; 7장 2절 및 10장 22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따르는 대화는 이 축제들이 무엇을 기념하며 그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다. 유다 관습이 분명하게(2,6; 18,28의 정결 규정; 19,36의 파스카 양) 또는 암시적으로(19.23의 대제사장의 옷의 구조) 언급되고 있다.
만일 요한의 배경이 되는 전승이 유다교와 팔레스타인에 확실하게 뿌리를 두고 있다면, 그 전승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활동을 휠씬 넘어가는 것이었다. 사실상 복음서 저자는 이것을 인정하고 있으며(2.22), 그와 같은 발전은 성령-보호자(16,12-14)가 인도하신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은 회당에서 추방되었다(9,22; 12,43). 정말로, 그리스도교인들은 회당의 경건한 헌신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16,2). 요한의 “유다인” 사^ 요한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발전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위의 각주 13에서 보았다. 공관복음의 예수와는 다르게, 요한의 예수는 예수의 신성과 선재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야기 한다(8,58; 10,30-38; 14,9, 17,5). 예수는 하느님으로 찬양을 받는다(20,28). 그리고 “유다인들”과의 기본적인 논쟁은 예수가 안식일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5,16-18, 19,7). 예수가 신체장애자를 지료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과 같은 전통적인 예수의 행동은, 유다인의 성경 해석에 따른 신학적 사고와 논의를 포함하고 있는 긴 설교의 제목이 되었다(5,30-47, 6,30-51a; 9,26-34). 공관복음 전승과는 반대로, 중요한 사마리아인 그룹이 예수의 처음 제자들과는 상관없이 예수를 믿는다(4,28-42).
그러한 발전은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나온 예수에 대한 전승이 수년을 지나면서 심사숙고되고 요한 공동체의 경험에 비추어 확장되었다는 것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마지막 예언자 및 유다인이 기대하는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시작한(1,40-49) 전승은 더 큰 일’’로 계속 나아갔다(1,50). 예수는 단지 종말에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실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 때는 이미 임했으며 그는 이미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이것이 그의 활동의 비밀이다. 그가 행하고 말씀하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기 전 그가 하느님과 함께 있올 때 그가 보고 들었던 것이다(5,19, 8,28; 12,49). 이스라엘 선생들은 시내산에 올라가서. 거기서 하느님과 교제를 가졌고, 그가 들은 것을 반복하기 위하여 내려왔던 모세를 믿었다. 그러나 예수는 모세보다 더 큰 자이다. 그는 하느님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을 보았던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받지 않는다(3,10-21). 사랑하는 제자는 공동체의 역사적 발전(또한 회당으로 추방)을 잘 견디어 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그의 경험에 뿌리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수십년 동안 그 경험을 계속 생각하며 구체화시킨 전승을 기록한 복음서와 사랑하는 제자 사이는 서로 의존하는 그러한 관계였을 것이다. 신학적인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전승을 독특한 문학적 기량을 갖고 있는 작품으로 엮어낸 복음서 저자는 추측컨대 사랑하는 제자의 제자였을 것이다. 저자는 사랑하는 저자에 대해서 3인칭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편집자가 있다면, 그는 또 다른 제자였을 것이다.
7. 요한의 사상에 미친 영향
요한복음은 종종 헬라적 복음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 빛과 진리 같은 추상적 개념을 사용한 것이 그렇다. 인간성을 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으로 분리하는 이분법과 말씀에 대한 개념 등의 이 모든 것들은 헬라의 철학적 사고의 산물로 예전에는 널리 인정되었으며, 더러는 철학과 종교의 결합(예, 비밀 문헌[Hermetic literature〕)이거나 이방 신비 종교의 산물로 인정되었다. 중도적인 제안은 유다 철학자 필로(주후 50년 이전)의 작품이 그러한 사고의 통로 구실을 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말씀” 개념과 관련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요한과 (초기)영지주의 관계를 강조한다. 위로부터 내려오신 구세주는 자신도 그를 받아들인 자들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으며(17,14), 그가 다시 돌아와 그들을 하늘에 있는 거주지로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하셨다(14,2-3). 이러한 모습이 영지주의에 합당한 것일 수 있다(비록 3,16의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합당치 않다고 할지라도). 지금까지, 사실상의 영지주의 작품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2세기 영지주의에 관한 지식은 교회 교부들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요한복음의 첫 번 주석자(2세기 중엽,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제자, 헤라클레온(Heracleon])가 영지주의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제, 1940년대 말 이집트의 케노보스키온(Chenoboskion, Nag Hammadi)에서의 발굴작업으로, 곱틱어로 된 영지주의 작품을 갖게 되었다(일부는 주후 2세기의 그리스어 원본을 번역). 비록 요한복음과 문체상 병행을 이루는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위의 각주 76), 전반적으로 이 새로운 문서들은 요한복음과 같은 내러티브체의 복음서와는 아주 다르다. 그리고 요한복음이 그와 같은 영지주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믿지 않는다. 또한 요한 복음과 후기 만다이즘 문서(위의 P160) 사이에 평행구절이 있다고 제안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한 구절들은 유다 구전과 영지주의 신화를 혼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이 모든 주장들은 요한의 용어와 사상이 나사렛 예수가 태어난 팔레스타인 세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한다.
아주 다른 또 하나의 접근법은 팔레스타인 세계(헬라주의에 영향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유산에 관한 사상이 주된 촉매가 되었던 세계) 안에 유다의 모든 다양성과 더불어 요한 그리스도교의 근본 기원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 유산은 율법과 예언서들로부터 판단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시 정경(protocanonical)의 지혜 문헌과 제 2의 정경 (deuterocanonical) 지혜 문헌(위의 p. 32를 보라) 및 외경과 중간사 문헌으로부터 판단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사해사본의 많은 글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이러한 문서들에서 비평가가 이전에 팔레스타인적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사상과 용어들을 볼 수 있다. 즉, 빛과 어두움로 나누어진 세계(요한 3,19-21), 악한자의 원리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요일 5,19), 빛 혹은 어두움 속에서 행하는 사람들(8,12; 요일 1,5-7), 진리를 행하는 것(요이 4; 요삼 4), 영을 시험하는 것(요일4,1), 진리와 사악함의 영(요일 4,6). 어휘와 사상에 있어서 사해사본과 요한복음의 유사성을 볼 때, 요한의 전승이 팔레스타인에서 발전할 수 없었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요한복음과 사해사본이 직접적으로 서로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쿰란 및 그보다 더 넓은 지역에 존재하였던 그러한 종류의 사상과 표현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세례자 요한에 대하며 알고 있는 것과 사해사본에서 증거되고 있는 믿음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비록 세례자 요한이 쿰란 공동체의 일원이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그리고 신약에서 요한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첫 제자들을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로 또 예수가 최소한 간단하게 세례를 행한 것으로 묘사한 것을 볼 때, 요한 복음은 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쿰란의 어휘와 생각을 요한 전승으로 끌어들인 통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긴다. 쿰란과 비슷한 많은 어휘가 요한복음의 예수 담화 속에도 등장한다는 것으로(공관복음에서 보다 훨씬 많이), 그와 같은 이야기의 원래 자료는 복음서 저자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고 성급히 결론내릴 필요는 없다. 만일 꿈란의 사상이 보다 넓은 지역으로 전해졌다고 한다면, 예수님도 그 어휘와 사상을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이 된 말씀은 그 당시에 사용하던 언어로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에 특별히 애착을 갖고 있었던 요한 전승은 보다 더 주의깊게 이것을 보존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 저자에게는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던 다른 사상들을 기억하고 강조하였을 것이다. 요한복음의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팔레스타인과 유다적 기원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기능성 때문에, 요한 공동체의 발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8. 요한 공동체의 역사
공관복음의 논의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예수에 관한 자료는 의도된 청중을 위하여 각각의 복음서 저자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기억을 받거나 보존하고 형성하였던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신학적 사회학적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줄 수 있다. 요한복음의 예수에 관한 이야기의 특징들은 논쟁점이 많고 서로 반대되는 상황을 말해주기도 한다. 또한 요한의 세 서신들은 요한의 사상을 반영해 주나, 청중과 그들의 문제가 보다 드러나게 초점이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다른 어떤 복음서 보다 요한의 배경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재구성해 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재구성에 대한 연구와 주석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주석은 복음서가 그의 독자께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였는가와 관계있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는 20장 31절에서 그의 목적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배경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제 나는 공동체의 역사에 대하며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복음서의 여러 요소들에 대하며 설명해 줄 수는 있지만,가정에 지나지 않으며 “아마도”라는 말을 모든 문장에 덧붙여야 할 필요가 있음을 명심하며야 한다. 복음서와 그 편집 뿐만 아니라 요한 서신들도 재구성과 관련되어 있다(12-14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다음의 네 시기가 관련되어 있다.
(1) 기록된 복음서와 그 사상이 형성되기 이전 시기(70년대 혹은 80년대까지). 팔레스타인에서 혹은 그 가까이에서, 세례자 요한을 따랐던 자들을 포함하여 비교적 규범적인 기대를 갖고 있었던 유다인들은 예수를 다윗적 메시아, 예언 성취자, 기적 행사자로 받아들였다(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칭호들을 보라). 그들 중 상당히 초기에 예수를 알았고 공생활 기간 동안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처음 예수를 따랐던 자들 외에 반(反) 성전 개념을 갖고 있었던 유다인들, 즉 사마리아의 개종자들(요한 4장)이 추가되었다. 그들은 예수가 모세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다윗적 배경과는 다른). 예수는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예수는 하느님을 보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 전하였다. 이 두 번째 그룹이 첨가됨으로 선재 그리스도론이 발달하게 되었고(하느님의 지혜 배경과 대조되는 것으로 보이는), 이로 인하여 요한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두 번째 하느님으로 삼음으로써, 유다인의 유일신 사상을 포기하였다고 생각한 유다인들과 논쟁을 하게 되었다(5,18). 결국 유다인 지도자들은 요한의 그리스도교인들을 회당에서 쫓아내었다(9,22, 16,2). 그들의 고향에서 소외된 요한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들을 마귀의 자녀(8,44)라고 생각한 “유다인들”에게 아주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다교에서 잃어버렸던 것들에 대한 보상으로, 종말론적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강조하였다(대치라는 강한 주제가 복음서에 나타남). 동시에 요한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믿지만 사람들 앞에서 회당과 단절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경멸하였다(9,21-23의 소경의 부모들이 한 예: 12,42-43). 위에 언급된 제자는 이러한 전환을 이루어내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다.
(2) 복음서 저자가 기본적인 복음서를 기록한 시기. “유다인”이 소경이며 믿지 않는 자들로 생각되었기 때문에(12,37-40), 헬라인들이 참여함은 하느님의 성취 계획으로 생각되었다(12,20-23). 공동체 혹은 일부가 헬라인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에서 디아스포라, 아마도 에페소지역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이 이주는 복음서의 헬라적인 분위기와 셈어적인 이름과 칭호(예, 랍비, 메시아)에 대한 설명에 빛을 던져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하여 요한의 사상은 보편적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인데, 이는 보다 광범위한 청중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부와 박해로 인하여 요한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세상(“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이 예수를 반대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 세상의 왕인 사탄의 영역
속에서 활동하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17,15-16; 14:30;16,33). 다른 그리스도교인들과의 관계에서, 합당치 못한 그리스도론을 갖고 있는 자들은 실제로 믿는 자들이 아니라고 거부하였다(6,60-66). 시몬 베드로에 의해 상징되는 자들은 예수를 믿었지만(6,67-69), 사랑하는 제자께 의해 상징되던 요한의 그리스도교인들만큼 그렇게 통찰력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20,6-9). 그들과 요한 공동체와의 분열이 치료될 수 있기를 바랐으며, 또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였다(10.16; 17,11). 그러나 복음서가 예수의 신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함과(회당 지도자들과의 투쟁으로 형성) 서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유일무이한 명령(13,34, 15,12, 17)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 예수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이 복음서로부터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견해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3) 요한 서신들, 요한일서와 요한이서가 기록된 시기(주후 100년경). 공동체는 둘로 나뉘었다. ① 어떤 사람들은 요한일서와 이서의 저자(복음서 저자와는 다른 저자 요한)가 제시하는 견해를 지지하였다. 그는 예수의 인성(육으로 오심)과 윤리적 행위(명령을 지키심)를 강조함으로써 복음서를 보충하였다. ② 많은 사람들이 탈당하였다(최소한, 요한일서 2,18-19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하여 적그리스도가 되었고 마귀의 자녀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예수의 신성을 과장하여서 예수의 인간적인 활동이나 그들의 행동(단순히 예수를 믿는 것 외에 -pp.550-52을 보라) 속에서는 이무 중요성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공동체 속에서는 저자가 탈당자들을 징계할 수 있는 권위적인 조직이 없었다. 오히려 탈당자들은 더 많은 지지자들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었다. 저자는 단지, 어떻게 하면 영들을 시험할 수 있는지 이 문제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요일 4,1-6).
(4) 요한삼서가 기록되었고 편집자가 21장을 첨가한 시기(주후 100-110?). 요한 공동체의 분열로 인하여 목회적인 조직인 발전하게 되었고, “보편 교회”에 가까운 3a에 묘사된 그리스도론에 공감을 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요한삼서에서, 비록 저자는 디오드레베가 너무 권위적이어서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디오드레베는 성령을 오직 선생으로서만 제시하였던 이전의 요한과는 상반되는 새로운 경향을 주장하였던 것 같다.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도 예수는 시몬 베드로에게 양을 먹이라는 임무를 주심으로, 목자의 모델인 예수와 더불어 인간 목자를 인정하신다’ 이러한 발전은 결국 일부 요한 그리스도교인들로 하여금 보다 큰 교회를 만들게 하였고 그 교회를 위하여 요한의 유산을 보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위의 35에 묘사된 그리스도론에 공감히는 자들은(아마도 보다 큰 그룹) 가현설(예수가 실제의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과 영지주의(이 세상은 너무 타락하여 하느님의 피조물이 아니라고 생각) 및 결국에는 몬타니즘(몬타누스가 교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보호자가 형상화된 것이다)으로 해석을 발전시켰다.
9. 생각해 보아야 할 논쟁점과 문제점들
(1)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대한 예수의 심판을 다룬 7장 53절-8장 11절은 최상의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빠져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로마 카톨릭을 포함하여) 이 이야기는 정경적이며 영감된 성경의 이야기지만, 8장 15절, 46절a와의 가능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의 이 문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일부 사본들은 이 이야기를 루카복음 21장 38절 이후에 놓아, 예수가 체포되기 전 예수에게 제시하는 간교한 질문의 연속인 것으로 본다(루까 20,20-40). 이것은 죄인들에 대한 예수의 자비하심에 관한 옛 이야기로(EH 3.39.17의 Papias를 보라). 네 복음서와는 아무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전하여졌으며, 교회가 어쩔 수 없이 간음을 용서해주는 변화를 갖게 된 후에야 복음서에 포함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Shepherd of Hermas, Mandate 4.1). 이 구절은 예수 전승과 교회의 가르침 사이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2) 마태의 산상수훈에서(5,44), 예수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13장 34절, 15장 12절. 17절의 “서로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요한의 예수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예수를 따르는 신자들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신다. 그러나 적들에 대해서는 o}무 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상 요한의 예수는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신다[요한 17,9, 1요한 5,16c>.) 그러므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새 계명”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분파주의자들에게는 좁은 의미로 생각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시각에서 볼 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사랑일 수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때,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부족으로 인하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는 그 때까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자들을 사랑한다고 선포하면서, 그 선교 지역에서 서로가 아주 심하게 싸워 왔다ᅵ!
(3) 요한의 성찬중시주의(sacramentalism) 문제에 대하여 아주 심한 분열이 존재한다. 학자들 중 한 그룹은 성찬(특히 세례와 성찬례)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거나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사실상 일부 사람들은 요한을 반성찬적(antisacramental)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들의 주장은 세례(참조. 마태 2819; 마르16,16)와 성찬례(참조. 마르 14,22-24와 병행구절들)에 대하여 겉으로 드러나게 언급하는 구절이 없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이로부터, 교회적인 편집자가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복음서를 만들기 위하여 성만친에 관한 언급들을 끌어들였다고 불트만은 주장하게되었다. 또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복음서들 중 성찬례를 가장 중시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그들은 세례와 성찬례에 관한 약 20개의 암시적인 혹은 상징적인 언급들을 물, 빵, 포도주 및 시력을 회복하는 것 등등에서 찾아낸다. 이것들을 지나친 상상에 의해서 찾아내는 것을 막기 위하여, 외적 통제 수단이 제시되어 왔다. 예를 들면, 제안된 요한의 성찬례 상징들이 다른 신약 서신의 성찬례 문맥에서 혹은 초대 교회의 글이나/혹은 지하묘지 (catacomb) 미술에서 입증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중간 입장은 요한의 예수님 말씀과 행동은 성찬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아니라 예언적인 기대라고 주장한다. 세례/성찬례 해석 외에, 요한의 예수는 그가 오신 그 세상의 실제를 언급하기 위히며 이 세상의 언어를 사용하였다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하늘을 상징하기 위하여 사용된 땅), 요한복음은 가장 성찬례적인 신약의 글로 생각되었다. 나의 견해로는 요한의 상징을 보다 광범위하게 성찬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입증될 수 있는 것으로, 색다른 언급을 세례와 성찬례에 관한 특정한 상징적 언급들로 생각한 결과 나타난 것이다.
(4) 위에서(p. 493을 보라) 생명의 빵에 관한 이중적 해석(예수의 계시와 예수의 살과 피)이 제시되었다. 루카복음 24장 27-35절에 의하면, 두 가지 방법으로 부활하신 예수의 존재가 인정되었다. 성경의 해석과 빵을 멤. 여기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의 예배 형식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수백년 동안 그리스도교인들이 양육을 받아 왔다(말씀의 예배〈성경을 읽고 선포함]와 성찬례의 예배〈성찬식]). 교회는 가끔 가장 강조해야 할 점이 무엇인가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이상적인 것은 주일 예배에 둘다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독자들은 조화를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지, 교회 생활 대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고자 할 수도 있다. 특히 만일 지난 수십년 동안 변화가 있었다면, 그러할 것이다.
(5) 나는 요한 공동체의 역사에 관한 연구와 요한의 자료 및 구성에 관한 논의가, 저자가 청중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였는지를 결정한다는 의미로 해석을 야기시키지 않았다고 위에서 주장하였다. 아마도 비율적으로, 배경 문제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갖는 반면,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메시아, 하느님의。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영생을 소유할 수 있도록, 복음서가 독자들을 돕는 일에는 너무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20,3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요한복음을 “영적인 복음서”라고 불렀다. 요한의 많은 강조점들이 그러한 통찰력을 갖게 해 준다. 예를 들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통히여 신자들은 하느님이 갖고 계신 생명을 얻게 되고, 예수의 살과 피를 통하여 그 생명은 자라고 양분을 취한다는 간단한 교훈적 묘사. 예수와의 일대일 접촉에 대한 인상적인 강조. 서로 다른 믿음의 반응들을구체화한 소경과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인물들의 역할, 사랑이 아들과 아버지를 연결해주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용어가 신자들과 예수를 연결해 준다는 것,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에게 도달할 수 있음, 모든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역할인 제자도의 중요성이 그것이디. 요한에 의하면, 진정한 신자들 사이에는 2급의 시민은 없다.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소유된 자녀들이다.